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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쉐마"(Shema)와 "헤렘"(Cherem)

그리스도의 군사 2013. 7. 13. 09:40

"쉐마"(Shema)와 "헤렘"(Cherem)

 

 

 

 왕대일 지음

 

구약의 신명기적 역사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를 알아야 한다. 하나는 이름하여 "쉐마"(신명기 6:4-5)로 성서 속의 이스라엘이 역사를 성공적으로 살아가는 바탕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주는 오직 한 분뿐이시다 (또는 주 우리의 하나님, 주님은 한 분이시다. 또는 주 우리의 하나님은 한 주님이시다. 또는 주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시다. 오직 주님만이).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신 6:4-5).

 

성공에 이르는 열쇠가 무엇인가? 그 열쇠는 다름 아닌 한 분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이다. 하나님의 말씀(율법)을 그 입에서 떠나지 않게 하고, 밤낮으로 묵상하며, 율법의 말씀을 실천에 옮기는 일이다(예, 수 1:5-9; 삿 2:11-23; 삼상 12:19-25; 왕상 2:2-4; 왕하 17:1-41). 가나안 땅으로 나아가는 자는, 가나안 땅에서 사는 자는, 누구나 이 열쇠를 그 수중에 간직하고 있어야 한다.

 

유일신 신앙(monotheism)을 가르치는 계명으로 이해되는 쉐마는 여호수아에서 열왕기하서에 이르는 역사서의 기조를 인과응보적으로 이끌고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며, 하나님의 뜻을 펼치던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복과 은혜를 그 땅에 더하게 하셨다고 본다. 반면, 하나님 외의 다른 신을 섬기고,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며, 하나님의 뜻이 아닌 사람의 뜻을 존중히 여기던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칼과 기근과 재앙과 염병으로" 그 땅을 치셨다고 본다.

 

신명기적 역사서를 이끌어가는 한 사상이 쉐마라면 또 다른 사상은 히브리어 "헤렘"이다. 쉐마와 헤렘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유일신 신앙의 긍정적인 이미지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면, 그 신앙의 부정적인 이미지는 야웨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에 대한 "배타적 거부"이다. 이 거부가 신명기의 히브리어에서는 "헤렘"("진멸," "전멸"이라는 뜻)이라는 말로 묘사되었다.

 

주 너희의 하나님이, 너희가 들어가 차지할 땅으로 너희를 이끌어 들이시고, 너희 앞에서 여러 민족 곧, 너희보다 강하고 수가 많은 일곱 민족인 헷 족과 기르가스 족과 아모리 족과 가나안 족과 브리스 족과 히위 족과 여부스 족을 다 쫓아내실 것이다. 주 너희의 하나님은 그들을 너희의 손에 넘겨주셔서, 너희가 그들을 치게 하실 것이니, 그 때에 너희는 그들을 전멸시켜야 한다. 그들과 어떤 언약도 세우지 말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아라. 그들과 혼인관계를 맺어서도 안 된다. 너희 딸을 그들의 아들과 결혼시키지도 말고, 너희 아들을 그들의 딸과 결혼시키지도 말아라. 그렇게 했다가는 그들의 꾐에 빠져서 너희의 아들이 주를 떠나 그들의 신들을 섬기게 될 것이며, 그렇게 되면 주께서 진노하셔서, 곧바로 너희를 멸하실 것이다(신 7:1-4).

 

신명기적 역사서의 바탕에는 헤렘 사상이 깔려 있다(신 7, 20장; 수 1-12장). 가나안적인 요소는 철저히 없애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헤렘이란 말이 사용되는 맥락은 이스라엘이 수행하는 하나님의 전쟁에서 등장한다. 헤렘이란 하나님이 싸우시기에 모든 것을 진멸해야 된다는 것을 나타내는 용어이다. 하나님이 싸우시기에 이스라엘은 전장에서 그 어떤 전리품도 얻을 수 없다. 그 모든 것은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 그것을 드러내는 표시가 모든 전리품을, 그것이 사람이든 짐승이든, 다 진멸해야만 되었다. 전리품은 모두 하나님의 것이다. 이스라엘은 전쟁 중 그 어떤 경제적 이익도 얻고자 해서는 안 된다.

 

여호수아를 비롯한 사사들, 사울이나 다윗 같은 군사 지도자들은 모두 이 헤렘에 철저해야만 되었던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다(비교, 삼상 15:1-9, 17-23; 삼하 8:2-14). 사실 헤렘은 이스라엘의 건강한 영적 삶을 위한 예방조치이다. 헤렘은 신학적 선언이다. 이스라엘이 망하게 된 것은 가나안적인 것에 이스라엘이 동화되었기 때문이라는 반성이 여기에 깔려 있다(우리는 이 역사서가 사건이 흐른 한참 뒤에야 글로 기록되게 되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헤렘은 이스라엘의 역사적 패배에 대한 반성으로 보아야 한다. 이스라엘이 겪은 재앙은 순전히 가나안 적인 요소를 이스라엘이 벗어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보충설명, "구약의 전쟁과 헤렘에 대하여">

 

 

구약의 역사서에 소개된 헤렘은 여러 가지로 해석된다. 그 해석이 어떠한 것이든, 헤렘은 여전히 오늘날 우리에게 도덕적, 윤리적 문제를 안겨주고 있다. 이스라엘의 승리를 위해서 이방인들을 무참히 진멸하라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왜 신명기는 가나안 땅의 여러 원주민들을 "진멸하라"는 것을 그토록 간절히 가르치고 있을까? 왜 신명기는 하나님을 전쟁 용사로, 이스라엘이 수행하는 전쟁을 거룩한 전쟁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일까?

 

이스라엘이 수행했던 전쟁기를 읽어보면 사실 이민족들의 탄성을 무시해 버리는 누(累)가 저질러지고 있다. 다른 민족을 정복하고 진압하는 무참한 행동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추진하는 모순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한편에서는 이스라엘을 억압과 집 없음에서 구출하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그 이스라엘에게 이방인들을 억압하고 진멸하며 쫓아내라고 명령하시고 있다면 이것은 모순이다. 이스라엘을 해방시킨 야웨 하나님이 다른 민족들을 파멸로 몰아놓는 역설을 자행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물어보자. 하나님은 정녕 이스라엘 민족만의 하나님이신가?

 

물론 야웨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주님이시다. 하지만 하나님은 온 민족, 온 세상의 주님이시다. 하나님을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으로 간주해버리고 만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온 세상을 정의와 공평으로, 사랑과 샬롬으로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는 성서적 믿음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요나가 겪었던 갈등이 바로 이것이었다. 요나의 하나님은 유다사람들뿐만 아니라 니느웨 도성의 사람들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이셨는데 요나는 그 하나님을 자기 민족의 신이라는 울타리 속에 가두어두고자 하였다.

 

만약 요나처럼 구약성서의 하나님을 민족주의와 배타주의로 채색해버린 신으로 간주한다면, 모든 자의 구세주가 되신다는 성서적 믿음은 벽에 부딪치게 된다. 우리가 믿는 야웨 하나님은 모든 것을 만드시고, 모든 생명을 다스리시며 지키시는 정의와 공평, 평화와 구원의 하나님이시다. 나사렛 예수가 십자가의 짐을 지고 골고다의 언덕을 오른 것도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구약성서의 전쟁 이야기는 평화와 구원을 전하시는 하나님 말씀의 빛에서 재평가되어야 한다. 그 한 예가 이사야의 예언에 있다.

 

자 올라가자, 주님의 산으로

야곱의 하나님께서 계신 전으로!

사는 길을 그에게 배우고 그 길을 따라 가자

......

그가 민족간의 분쟁을 심판하시고

나라 사이의 분규를 조정하시리니.

나라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민족들은 칼을 들고 서로 싸우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군사훈련도 하지 아니하리라 (사 2:3-4)

 

이사야의 예언은 야웨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이 무엇인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늑대가 새끼 양과 어울리고, 표범이 수염소와 함께 딩굴며, 어린 아기가 새끼사자를 몰고 다니며, 젖뗀 아이가 독사의 굴에 겁 없이 손을 넣으며, 서로 헤치거나 죽이는 일이 다시는 없는"(사 11:6-8) 날은 "이새의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나오고, 그 뿌리에서 새싹이 돋아나는 날" 이루어지리라고 예언한다.

 

예수께서 걸은 길은 바로 이 이사야의 예언을 구현하시기 위해서이다. 그 도상에서 그는 구약 신명기의 쉐마(신 6:4-5)를 재해석하신다. 쉐마와 함께 "이웃 사랑"(레 19:18)을 가르치는 계명을 토라의 완성으로 정리하였다(마 22:37-39).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레 19:18, 개역).

 

선생님, 율법 가운데 어느 계명이 중요합니까?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하셨으니,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으뜸가는 계명이다. 둘째 계명도 이것과 같은데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여라"한 것이다. 이 두 계명에 모든 율법과 예언자들의 본 뜻이 달려 있다(마 22:36-40).

 

구약 역사서의 전쟁 이야기는 하나님이 이루시려는 평화 이야기에서 상대적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갈등과 분쟁, 전쟁과 싸움은 그 어떤 이유로도 진리가 될 수 없다. 하나님의 진리는 정의와 평화, 진실과 구원이 입맞춤하는 곳에서 나온다(시 85:10-13). 우리는 평화를 "만드는" 자들, 평화를 이루기 위하여 인내하는 자들, 샬롬을 이루기 위해서 자기 손의 "낫을 쳐서 보습을 만드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사 2: 4; 마 5:9).

 

(구약성서 이해 열마당 새길 왕대일 지음 2003)

출처 : 창골산 봉서방
글쓴이 : 봉서방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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