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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관상(觀想) 기도가 무엇인가?

그리스도의 군사 2013. 11. 19. 20:50

 

 

 

 


관상(觀想) 기도 (Contemplative Prayer)

 

언제부터인가 한국 교회에는 로마카톨릭의 가르침과 종교의식이 하나 둘 침투하여 자리잡기 시작했습니다. 은사주의, 신비주의, 종교적 수행, 뜨레디아스, 알파코스, 종교일치운동 등이 그런 대표적인 예들입니다.그런 로마카톨릭의 가르침이나 종교 의식들은 전혀 성경 말씀에 근거한 것들이 아니며, 오히려 성경 말씀의진리를 왜곡하고 배척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성령 운동이라는 이름이나 영성 훈련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교회 내에 널리 보급되고 있습니다.
 
이는 한국 교회가 성도들을 진리의 말씀으로 가르치고 양육하여 주의 군사로 무장시키려고 하기 보다는 뭔가 그럴듯하게 보이는 프로그램들을 도입해서 단기간에 사람들을 많이 끌어모으는데 더 큰 관심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부 종교 지도자들의 눈에는 교인들의 머리 숫자는 교회 세력을 과시하는 수단으로 보이며, 그것은 교회 재정 규모와 예배당 건물의 크기를 나타내는 척도가 되며, 외부적으로는 목회의 성공과 실패를 평가받는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일부 목회자들은 이런 외적인 성장을 영권, 물권, 인권이라는 용어로 미화시켜서 표현하기도 하지만, 이런 용어나 개념은 성경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들입니다.
 
일부 부패한 종교 지도자들은 사람들을 많이 끌어모으고 기존 교인들을 많이 동원할 수만 있다면, 그 내용이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하는 것인지 여부는 검토도 하지 않고 무작정 도입해 버립니다. 하지만, 많은 교회에서 부흥과 영적 성장이라는 명분을 내걸고 시행하는 "영성 운동", "영성 계발", "영성 훈련"이라는 것들은 전혀 성경적인 근거가 없으며, 오히려 성도들의 건전한 신앙 생활에 치명적인 해를 입히는 위험한 사상들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성경에는 그들이 말하는 "영성"이라는 용어나 개념 자체가 없습니다. 영성 훈련가들이 저술한 책들을 살펴보면, 영성 운동, 영성 계발, 영성 훈련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그들이 말하는 영성이 성도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물려받는 속성이나 성령의 열매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수행과 노력과 훈련의 산물로 얻게 되는 어떤 영적인 능력을 의미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인간이 본래 영적으로 대단한 능력을 가진 존재이므로 수행과 훈련을 통해서 자신의 감추어진 잠재능력을 계발하기만 하면,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힘과 능력을 얻게 된다는 뉴에이지 사상을 담고 있으며, 그런 사상의 원류가 되는 것은 고대 바빌론의 신비종교, 종교적 수행을 강조하는 로마카톨릭의 사상, 현대 인본주의 심리학 등입니다.
 
한 마디로 이런 영성 훈련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여 사람들이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교회에 출석해 줄 교인들을 모집하는 프로그램입니다. 그리고, 거듭난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가운데 삶이 변화되어 성령의 열매를 맺도록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훈련 프로그램을 통해서 도를 닦게 만드는 종교적 수행 프로그램입니다.
 
저는 성경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수행과 훈련을 통해서 사람의 영적인 속성이 더 높은 수준으로 향상된다는 주장을 인정할 수 없으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성도들이 도를 닦거나 수련을 해서 영적인 성장을 이루어야 한다는 가르침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사람들이 만들어낸 명령과 교리이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골 2:22-23, 킹흠정) [22] 이 모든 것은 사용하는 대로 없어질 것이요) 사람들의 명령과 교리들에 따른 것이라.[23] 참으로 이런 것들은 의지대로 경배하고 자기를 낮추며 몸을 경시하는 데는 지혜가 있는 것 같이 보이나 육체를 만족시키는 데는 아무 가치가 없느니라.
 
이런 영성 훈련 프로그램들에 대해서 일일이 다룰 수는 없고, 최근에 게시판 상으로 언급된 바와 같이 영성 훈련의 대표적인 수행방법으로 알려진 "관상" 혹은 "관상기도"에 대해서 몇 가지만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1. 관상이란 무엇인가?
 
관상이라는 말의 사전적 정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관상(觀想)
  (1) <불교> 수행의 한 가지로서 마음을 오로지 일정한 대상에 기울여, 어떤 상념을 일으키게 하여 번뇌를 없애는 일.
  (2) <종교> 신(神)을 직관적으로 인식하고 사랑하는 일.
  (3) <철학> 순수한 이성의 활동에 의하여 진리나 실재를 인식하는 일.
 
요즈음 영성 훈련가들이 주장하는 관상이라는 말은 "명상 수행을 통한 절대자와의 만남"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그러나, 성경 말씀에 의하면 사람은 이성이나 직관이나 논리나 철학이나 수행을 통해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보다 비교할 수 없을만큼 크고 놀라운 분이시기 때문에(사 55:8-9), 이 세상의 지혜나 방법으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고전 1:21).
 
(사 55:8-9, 킹흠정) [8]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다르니라. 주가 말하노라.[9] 하늘들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고전 1:21, 킹흠정)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세상이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으므로 하나님께서 복음 선포의 어리석은 것으로 믿는 자들 구원하시는 것을 기뻐하셨도다.
 
우리는 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 아버지께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요 14:6, 킹흠정)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 오지 못하느니라.
 
사람이 명상과 같은 종교적 수행을 통해서 하나님과 깊은 만남을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멉니다. 성경의 가르침과 어긋나는 이런 관상 수행법은 로마카톨릭의 수도원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 글에서는 로마카톨릭 수도원에서 주장하는 "관상" 혹은 "관상기도"가 무엇인지 그들의 주장을 중심으로 하나씩 살펴보며, 진리의 성경 말씀을 통해 그런 수행법의 정체와 문제점을 하나씩 짚어보겠습니다.
 
아래에 인용하는 "관상기도의 종류", "관상기도의 방법"은 로마카톨릭 수도원의 자료이며, 그들이 주장하는 내용은 별도로 파란색 글씨로 표시하며, 그에 대한 제 의견은 '=>' 이하에 기록하겠습니다.
(참고사이트: http://w1.hompy.com/sudowon/   인터넷 수도원)

 
(1) 관상기도의 종류
 
1) 완전 관상(주부적 관상) : 일체의 상상이나 이미지가 멈춘 순수한 어두움의 상태에서 하나님과 일치경험을 하는 것이다. 관상경험에 이르기 위해서는 일체의 상상력이나 이미지를 끊임없이 제거하여 감각의 어두움과 영의 어두움에 이르러야 한다.  모든 피조물과 인간의 개념 속에서 유추할 수 있는 모든 이미지나 속성들을 하나씩 하나씩 부정해 가는 영적 여정을 가게 될 때에 결국 인간의 모든 개념이나 언어는 잠을 자게 되고 깊은 침묵의 심연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 상태가 순전한 영의 세계로서 하나님과 일치의 경험을 이루게 된다는 것이다. 이 관상기도법은 갈멜수도회의 전통이다.
  (위의 내용은 로마카톨릭 수도원의 자료임)
 
  => 빛이요 진리이신 하나님을 이성도 자아도 판단력도 없는 "순수한 어둠의 상태"에서 만나라고 하는 것이 로마카톨릭의 가르침입니다. 또한 이를 위해서는 감각의 어두움과 영의 어두움에 이르러야 한다고 합니다. 저는 이 글을 읽고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사람이 이성과 판단력을 잃고 영적인 무지와 혼돈과 흑암 속에 있으면 누구를 만나게 되겠습니까? 그 속에서 하나님을 만난다구요? 하나님이 아니라 어둠의 권세를 잡은 마귀를 만나게 될 겁니다.
 
성경은 기록하기를, 하나님은 빛이시며 그 분 안에는 전혀 어둠이 없다고 합니다(요일 1:5, 약 1:17).
 
(요일 1:5, 킹흠정) 그런즉 우리가 그분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밝히 드러내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요 그분 안에는 전혀 어둠이 없다는 것이라. 
(약 1:17, 킹흠정) 모든 좋은 선물과 모든 완전한 선물은 위에서 빛들의 아버지로부터 내려오거니와 그분께는 변함도 없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느니라.
 
반면, 마귀와 악한 영적 세력들은 어둠에 속해 있습니다(엡 6:12, 벧후 2:4, 유 1:6).
                 
(엡 6:12, 킹흠정) 우리는 살과 피와 맞붙어 싸우지 아니하고 정사들과 권능들과 이 세상 어둠의 치리자들과 높은 처소들에 있는 영적 사악함과 맞붙어 싸우느니라.
(벧후 2:4, 킹흠정) 하나님께서 죄를 지은 천사들을 아끼지 아니하사 지옥에 던지시고 어둠의 사슬에 넘겨주어 심판 때까지 예비해 두셨으며
(유 1:6, 킹흠정) 또 자기들의 처음 신분을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들의 거처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 때까지 영존하는 사슬로 묶어 어둠 밑에 예비해 두셨는데
               
우리도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기 전에는 한 때 어둠에 속해 있었지만(엡 5:8), 세상의 빛으로 오신 우리의 주 예수님을 믿음으로(요 8:12, 요 12:46) 말미암아 어둠에서 빛 가운데 들어가게 되었습니다(벧전 2:9).
 
(엡 5:8, 킹흠정) 너희가 한 때는 어둠이었으나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니 빛의 자녀들로서 걸으라.
(요 8:12, 킹흠정) 그때에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 속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하시니라.                  
(요 12:46, 킹흠정)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이것은 누구든지 나를 믿는 자는 어둠에 거하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로다.               

(벧전 2:9, 킹흠정) 그러나 너희는 선정된 세대요 왕가의 제사장이요 거룩한 민족이요 특별한 백성이니 이것은 너희를 어둠에서 불러내어 자신의 놀라운 빛으로 들어가게 하신 분께 대한 찬양을 너희가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은 사람들을 빛 가운데로 부르시지만, 마귀는 사람들에게 복음의 빛이 비치지 않도록 가로막습니다.
 
(고후 4:4, 킹흠정) 그들 속에서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가려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복음의 빛이 그들에게 비치지 못하게 하였느니라.
 
바로 그 마귀의 하수인 역할을 하고 있는 로마카톨릭에서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분별력인 이성과 지각을 버리라고 가르칩니다. 그래야만 사람들이 하나님의 빛 가운데로 나아가는 것을 막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지각이 어두워진 자는 어리석은 자요, 하나님을 떠난 자라고 합니다.
 
(렘 5:21, 킹흠정) 오 어리석고 지각이 없으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백성이여, 이제 이 말을 들을지어다.   
(롬 1:21, 킹흠정) 그들이 하나님을 알되 그분을 하나님으로 영화롭게 하지도 아니하고 감사하지도 아니하며 오히려 자기들의 상상 속에서 허망해지고 또 그들의 어리석은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엡 4:18, 킹흠정) 그들은 지각이 어두워졌으며 자기들 속에 있는 무지함과 자기들 마음의 눈먼 것으로 인해 하나님의 생명에서 떨어져 있도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지각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으며(막 12:33), 우리의 지각과 감각을 어둠의 심연 가운데 던져 버리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지각의 눈을 밝혀서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과 그 분의 상속유업의 영광을 깨닫기를 원하십니다(엡 1:18).
 
(막 12:33, 킹흠정) 또 마음을 다하고 지각을 다하고 혼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자기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를 드리는 번제 헌물과 희생물을 다 합친 것보다 나으니이다, 하매

(엡 1:18, 킹흠정) 너희의 지각의 눈을 밝히사 그분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들 안에 있는 그분의 상속 유업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하며
 
이런 말씀들에 비추어 볼 때, 로마카톨릭의 관상 기도는 성경의 가르침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며,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방법이 아니라, 사람들을 어둠의 세력들에게로 넘겨주는 수단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 불완전 관상(획득적 관상) : 상상력이나 갖가지 이미지가 관상적인 체험에 이르는 매개체가 된다는 것이다. 가장 하찮은 피조물로부터 가장 고상한 하나님의 속성을 단계적으로 관상해 가면서 하나님과의 만남을 추구하는 영적 여정의 패턴을 말한다. 이 관상기도법은 예수회의 전통이다.
 
  => 이들은 상상력이나 이미지를 관상적 체험에 이르는 매개물로 삼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 기도하기 위해서 어떤 이미지들(형상들)을 사용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주께서는 형상들을 만들지 말고 그것들을 깨뜨리라고 하셨습니다.형상을 만드고 섬기기위해 십계명의 제2계명을 바꾸어버린 카톨릭의 사상을 받아드리는 자체만으로도 우상숭배하는 것입니다.
 
(출 20:4, 킹흠정) 너는 너를 위하여 어떤 새긴 형상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모습이든지 만들지 말며

(출 34:13, 킹흠정) 오히려 너희는 그들의 제단들을 멸하고 그들의 형상들을 깨뜨리며 그들의 작은 숲들을 베어 낼지니라.
 
로마카톨릭에서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갖거나 그것을 읽고 해석하는 것을 금했습니다. 그 대신 십자가나 마리아상이나 묵주, 성당 벽화 같은 이미지을 통해서 하나님을 상상하도록 했습니다. 사람들이 진리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을 금하고, 이미지들(형상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라고 하는 로마카톨릭의 가르침이 관상 기도에서도 그대로 이어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 그들의 십자가에는 아직 부활하지 못한 예수님을 매달아 놓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고, 그것들을 깨뜨리라고 했는데, 이처럼 형상들을 매개물로 해서 하나님을 만나라는 가르침은 로마카톨릭처럼 우상을 숭배하라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러나, 진리의 성경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이것은 결코 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것은 주의 진노를 받게 될 가증스러운 죄악입니다.
3) 추리적 관상 : 초자연적 진리를 꿰뚫어 보고, 그것을 사랑하며 은총의 도움으로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 그것에로 마음을 돌려 추리하는 것이다.
               
=> "초자연적인 진리"라는 말은 뉴에이지 운동가들이 사용하는 "우주 정신", "우주적 진리", "우주 에너지"를 말하는 것으로 그 실체는 사탄을 의미합니다. 즉, "그것"을 사랑하며, "그것"의 은총을 받고, "그것"의 도움을 입어, "그것"을 실천하고, "그것"에로 마음을 돌리라는 것은 사탄을 숭배하고 섬겨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로마카톨릭에서는 왜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를 묵상하라고 가르치지 않고, "초자연적인 진리"라는 이상한 표현을 사용할까요?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부활하신 구세주로 믿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에 죽은후 무덤에 있는 카톨릭의 성인들과 같은 위치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요 8:44, 킹흠정)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므로 너희 아비의 욕망들을 행하려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자요 자기 속에 진리가 없으므로 진리 안에 거하지 아니하고 거짓말을 할 때에 자기의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이기 때문이라.
(2) 관상기도의 방법
 
아래는 카톨릭 수도원에서 제시하는 관상기도의 방법입니다. 잘 읽어보시고 이게 도대체 무엇을 하는 수련방법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1) 정신을 집중할 수 있는 조용하고 편안한 장소를 선택한다.
2) 그리고 적당한 운동으로 굳은 몸을 풀어준다 그리고 편한 자세로 앉는다.
3) 어깨에 힘을 빼고 허리를 곧게 펴고 손은 가볍게 무릎위에 가볍게 올려 놓는다.
4) 대기 중의 공기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생각한다.
5) 그리고 호흡의 리듬을 느리게 조정한다. 숨을 들이마시고 내뿜는 비율을 약 1:2 로 하는 것이 좋다.
6) 이렇게 하는 동안 내적으로는 마음의 자리에 초점을 맞춘다.
7) 이러한 자세에서 마음과 정신이 연결될 때 기도자는 예수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한다.
   "주여" 또는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를 부른다.
 
▶아마 이것을 처음 읽으신 분은 요가나 단전호흡, 기 수련을 떠올리셨을 겁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로마카톨릭에서 관상기도하는 방법입니다.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이것은 단전호흡, 뇌호흡, 인도의 요가 명상, 불교의 참선, 마인드콘트롤 수행에서 사용하는 의식이지 성경 말씀에 기초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 어디에도 "대기 중의 공기가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생각하고 호흡 수련을 하라는 가르침은 없습니다. 그들은 숨을 들이마시면서 하나님과 성령님을 들이마시고, 숨을 내쉬면서 죄악을 내뱉으라고 합니다. 이것은 본래 내공수련 방법 중 호흡수련(조식, 調息) 방법으로, 맑은 기를 들이마시고 탁한 기를 배출한다는 호흡방법에서 들숨과 날숨 대신에 하나님과 죄악을 대입한 것입니다. 
  
아래 글은 동양의 내공 수련법과 뇌호흡, 뇌파진동에 대한 글입니다. 관상 수행법은 이런 동양의 단전 호흡이나 기 수련에 바탕을 둔 것이지 성경 말씀에 근거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호흡수련의 목적은 운기(運氣)와 함께 축기(蓄氣)에 있습니다, 축기란 우주의 기운을 풍부하게 받아 생명력을 충만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호흡을 잘 하면, 생명력이 조화롭게 흐를 뿐 아니라, 생명력도 충만해집니다. 또, 마음과 정신도 밝아집니다. 사람은 호흡을 통해서 몸에 필요한 공기와 함께 생명력을 얻습니다. 생명활동에 쓰여지 는 기운을 음식물과 호흡을 통해 얻는 것입니다. 또 음식물에서 얻어지는 생명력을 지기(地氣), 호흡으로 얻는 생명력을 천기(天氣)라 부릅니다. 우주에는 무한한 생명력이 있습니다. 이 우주의 생명력이 호흡을 통해 몸 안으로 들어 옵니다." (내공수련법 중 호흡수련)
 
"뇌파진동을 하고난후 천지기운이 백회로 들어와 나의 온몸의 세포로 들어와 맑은 기운으로 감싸주었다. 답답한 마음도 뚫리고 두려운 마음도 없어지고 편안해진다. 천지기운 내기운 내기운 천지기운~ 천지마음 내마음 내마음 천지마음~" (Brain Operating System) 
 
동양의 도인들이나 로마카톨릭의 관상수행자들은 호흡을 통해서 "우주 기운", "하나님"을 받아들인다고 하지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시지 에너지나 기(氣)가 아닙니다. 그 어느 누구도 들이키는 숨으로 하나님을 들이마실 수가 없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하지 않고 숨을 내쉬는 것으로 우리의 죄를 내보낼 수도 없습니다. 호흡 수련으로 하나님을 들이마신다는 관상 수행자들의 주장은 하나님을 인격체가 아니라, 온 우주 공간에 퍼져있는 우주 에너지, 기, 영향력으로 여기는 뉴에이지 사상가들의 주장에 뿌리를 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위 내공수련자들의 호흡수련 방법은 우주의 생명력을 몸으로 받아들이는 수행법인데, 우주 안에 생명력이 있으니 그 우주 에너지를 받아들이라는 가르침은 뉴에이지 사상의 주장이며, 이는 마귀의 영을 받아들이라는 이야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관상 수행자들이 저런 의식을 통해서 수련을 하면서, 입으로만 "주여~", "예수여","주 예수여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중얼거린다고 그것이 주께 드리는 기도가 될 수 있겠습니까?

악한 영에 사로잡힌 무당이 불상, 마귀상 세워놓고 섬기며, 십자가도 함께 걸어놓고 점치고 굿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단전 호흡을 통해 우주 기운(마귀의 영)을 받아들이고 마귀와 교제하면서 입으로만 "주여~"라고 부른다고 해서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관상기도의 수행방법이 전혀 성경적인 근거가 없으며, 오히려 이것은 뉴에이지 사상이나 동양의 명상 수련에 그 기원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 관상과 묵상의 차이
 
힌두교의 명상 수행, 불교의 참선, 로마카톨릭의 관상은 한결같이 사람들에게 이성과 지각과 판단과 오욕칠정을 버리고, 피아도 모두 잊고, "마음을 비우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마음을 비우지 말고, 마음을 채우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주의 말씀을 "묵상"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묵상이란 비우는 것이 아니라, 채우는 것, 곧 우리의 마음 속을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으로 가득 채우는 것입니다. 묵상(히, 하가)이라는 말의 의미는 "중얼거리다, 신중히 생각하다, 말하다, 연구하다"라는 뜻입니다. 즉, 묵상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그 의미를 깨닫고, 자신의 생활 가운데서 그 말씀에 순종해야 할 영역을 찾아보고, 행동으로 순종할 준비를 하는 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 1:8, 킹흠정) 너는 이 율법 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밤낮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네 길을 형통하게 하며 또한 크게 성공하리라.
 
(시 1:2, 킹흠정) 그는 주의 율법을 기뻐하며 그분의 율법을 밤낮으로 묵상하는도다.
 
(시 119:48, 킹흠정) 또 내가 지금까지 사랑한 주의 명령들을 향하여 내 손을 들고 주의 법규들을 묵상하리이다.
 
(잠 6:21-22, 킹흠정) [21] 그것들을 계속해서 네 마음에 묶어 두고 네 목에 매어 두라.  [22] 그것이 네가 다닐 때에 너를 인도하고 네가 잘 때에 너를 보호하며 네가 깰 때에 너와 말하리니
 
그러므로, 우리는 이성의 끈을 놓아버리고, 지각과 판단력이 없는 암흑과 무지의 상태, 영적인 어둠의 상태로 들어가서 어둠의 세력, 마귀와 접하는 관상 수련을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진리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연구하며, 그 말씀을 지켜 행하는데 힘써야 할 것입니다.
               
3. 관상 수행의 문제점
 
(1) 침묵하기
 
로마카톨릭의 관상은 하나님을 만나려면, 이성과 지각을 모두 버리고 침묵의 심연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 근거로 시편 62:5이나, 시편 46:10 등을 제시합니다.
 
하지만, 킹제임스성경을 보면 시편 62:5에 "잠잠하라"는 표현은 없습니다. 시편 기자는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라고 했습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을 간절히 바라라는 것이지, 주께 대한 생각을 접어두고, 아무 생각도
판단도 기대도 하지 말고 자신을 무지와 혼돈과 흑암에 방치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시 62:5, 개역)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대저 나의 소망이 저로 좇아 나는도다
(시 62:5, 킹흠정) 내 혼아, 너는 오직 하나님만 바라라. 내가 기대하는 것이 그분에게서 나오는도다.
(시 62:5, KJV) My soul, wait thou only upon God; for my expectation is from him.
 
그리고, 시편 46:10에서 "잠잠하라"라고 한 것은 그 분의 성도들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라, 그 앞 구절에 나오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에게 "입 닥치고 가만히 있으라"는 겁니다.
 
(시 46:10, 개역)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열방과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시 46:10, 킹흠정) 가만히 있고 내가 하나님인 줄을 알지어다. 내가 이교도들 가운데서 높여지고 땅에서 높여지리로다.
 
킹제임스성경으로 시편 말씀에서 "잠잠"이라는 단어를 찾아보면, 주의 원수들(시 8:2), 사악한 자들(시 31:17), 거짓 입술들(시 31:18)에게 잠잠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주의 성도들은 내가 주 앞에서 잠잠하지 않고 기도하겠다(시 22:2, 시 30:12)고 했고, 하나님이여 잠잠하지 마시고 내 기도에 응답하소서(시 28:1, 시 35:22, 시 39:12, 시 50:3, 시 83:1, 시 109:1)라고 기도하였습니다.
 
로마카톨릭은 관상을 통해, 불교 수행자들은 참선이나 묵언수행을 통해 어떤 신적인 존재를 만나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이성과 분별력을 사용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언어를 사용하여, 인격적으로 하나님과 교제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분의 말씀을 우리의 언어로 기록하게 하사 주의 뜻과 진리를 보여주셨으며, 또한 우리의 언어로 표현한 기도(소리내어 기도하거나 조용히 마음 속으로 기도하거나)를 듣고 응답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말씀과 기도를 통하여 주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기를 원하십니다. 로마카톨릭처럼 관상 기도를 통하여 인간의 이성과 감각이 둔해지고, 지각이 어두워지고, 마음 속이 공허한 상태, 흑암의 심연에 잠긴 상태에서 우리의 빈 틈을 노리고 비집고 들어오는 영적인 세력이 있다면, 그것은 마귀에게 속한 악한 영들입니다.
 
(2) 마음 비우기
단전호흡, 힌두교 명상, 불교의 참선, 로마카톨릭의 관상과 같이 마음을 비우는 것은 사람을 마귀와 접하기 좋은 최적의 상태로 만듭니다.
 
성경 말씀에 의하면, 사람에게서 나온 부정한 영이 쉴 곳을 구하다가 찾지 못하고, 자기가 나왔던 곳으로 돌아가보니 그 집이 깨끗하게 비어있고, 청소가 된 것을 보고, 자기보다 더 사악한 영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 거기 거한다고 했습니다.
 
(마 12:43-45, 킹흠정) [43] 부정한 영이 사람에게서 나와 마른 곳으로 다니며 쉴 곳을 구하나 전혀 찾지 못하고 [44] 이에 이르되, 내가 내 집 곧 내가 나온 곳으로 돌아가리라, 하고는 가서 보니 그 집이 비고 청소되고 꾸며져 있으므로  [45] 이에 가서 자기보다 더 사악한 다른 영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 거기 거하매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나쁘게 되니라. 이 사악한 세대도 참으로 그와 같이 되리라, 하시니라.
 
성경은 이성도, 지각도, 감정도, 영적 분별력도 모두 버리고 마음을 깨끗이 비우고 청소해 놓았더니 마귀가 들어가 거하여 그 사람의 형편이 더욱 나빠졌다고 했습니다. 원래 "마음 비우기" 수행 방법은 뉴에이지 사상가들이 "우주 정신", "우주 에너지", "우주적 진리"라고 부르는 마귀의 영을 영접하기 위한 의식이므로 우리는 저런 악한 의식을 본받거나, 그것을 기독교적인 것에 접목시키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비록 악한 모양을 하고 있어도 기독교적인 색채를 지닌 것과 적당히 혼합하면 하나님이 인정해 주실 거라고 생각합니까? 성경은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성경은 악의 모든 모양도 삼가라고 하셨습니다.
 
(살전 5:22, 킹흠정) 악의 모든 모양을 삼가라.
 
죽은 파리가 향유에 떨어지면 파리가 향기롭게 될까요, 향기름이 부패하게 될까요? 정답은 아래 성경 말씀에 나와 있습니다.
(전 10:1, 킹흠정) 죽은 파리들이 약제사의 향유에서 지독한 냄새가 나게 만드는 것 같이 작은 어리석음도 지혜와 명예로 명성을 얻은 자를 그렇게 만드느니라.
 
우리는 바알세붑(파리의 신, 똥의 신)으로부터 나온 죽은 파리들, 즉 로마카톨릭의 가증스럽고 거짓된 가르침이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구속받은 성도들에게, 주의 몸된 교회에 들어와서 섞이는 것을 단호하게 거부해야 합니다.
 
(3) 특정 단어 중얼거리기
 
관상기도를 가르치는 사람들은 관상을 위한 다양한 기법들을 소개하는데, 그 중의 한 가지가 특정한 낱말이나 어구를 반복적으로 되뇌이는 것입니다. 머튼, 키팅, 페닝턴, 포스터 등은 관상기도 중에 예수, 주님, 아버지, 친구, 또는 예수의 기도 등의 낱말이나 어구를 반복적으로 중얼거리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할 때에 이교도들처럼 헛된 말을 되풀이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마 6:7).
 
(마 6:7, 킹흠정) 오직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교도들과 같이 헛된 말을 되풀이하지 말라. 그들은 자기들이 말을 많이 하여야 아버지께서 들으실 줄로 생각하느니라.
 
성경에는 이교도들이 무의미하게 주문 외우듯이 특정 어구만 되풀이하여 중얼거리는 모습들이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바알 추종자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오 바알이여, 우리 말을 들으소서" 라는 구절만 계속 되풀이하였고, 다이아나 여신을 섬기는 자들은 두 시간 동안 "위대하시도다. 에베소 사람들의 다이아나여"라는 말만 반복했습니다.
 
(왕상 18:26, 킹흠정) 그들이 자기들에게 넘겨준 소를 취하여 예비하고 아침부터 정오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러 이르되, 오 바알이여, 우리 말을 들으소서, 하였으나 아무 소리도 없고 응답하는 자도 없으므로 그들이 그 만들어 놓은 제단 위에서 껑충 껑충 뛰더라.
 
(행 19:34, 킹흠정) 그들은 그가 유대인인 줄 알고 모두 한 목소리로 두 시간쯤 소리 질러 이르되, 위대하시도다. 에베소 사람들의 다이아나여, 하더라.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는 어떻게 기도했을까요? 로마카톨릭의 관상 기도자들처럼 "주여, 주여, 주여~" 하거나,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이렇게 의미없는 말만 반복하여 되풀이했습니까? 성경에는 엘리야가 정상적인 이성과 지각을 가지고, 침묵이 아닌 언어적 표현을 사용하여, 하나님 앞에서 구체적인 내용으로 기도한 사실이 다음과 같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왕상 18:36-40, 킹흠정) [36] 저녁 희생물을 드릴 때에 대언자 엘리야가 가까이 가서 이르되,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주 하나님이여, 주께서 이스라엘 안에서 하나님이신 것과 내가 주의 종인 것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한 것을 저들이 이 날 알게 하소서.[37] 오 주여, 내 말을 들으소서. 내 말을 들으사 주께서 주 하나님이신 것과 또 주께서 그들의 마음을 다시 돌이키신 것을 이 백성이 알게 하소서, 하매
 
로마카톨릭의 관상 기도 수행자들이 입버릇처럼 반복적으로 중얼거리는 "예수, 주님, 친구" 등의 낱말은 인격적으로 주님을 부르고, 그 분과 소통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표현을 빌자면, "그것이(그 낱말들이) 걱정들, 기억들, 생각 등 당신의 내부 세계와 상호적용하게 허락하면서 그것을 외워서 자신에게 천천히 반복하라. 이처럼 특정 단어를 자꾸 반복적으로 되뇌이면 우리가 우리의 평범한 의식을 넘어서 무한자에게로 가게 될 것이다." 라고 합니다. 이는 관상 기도에서 이런 단어 중얼거리기가 일종의 자기 최면을 유도하는 주문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힌두교의 명상 수행이나 뉴에이지 명상에서는 명상가에게 "만트라"(진언 주문)라고 불리는 어떤 한 낱말을 주고 수행 중에 그것을 되풀이하도록 합니다. 이것은 흔히 어느 신의 이름이거나, "나는 그것이다", "나는 존재한다" 등을 의미하는 짧은 구절로, 반복적인 되뇌임을 통해 사람으로 하여금 무아지경에 빠지게 만듭니다.
 
관상기도에서 사용하는 "특정 단어 중얼거리기" 수행법은 바로 이와 같은 자기 최면, 동양종교의 수행법, 뉴에이지 사상의 가르침에서 비롯된 것이지 결코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명심해야 합니다.
 
(4) 관상(觀想), 시각화 기법
 
관상이란 단어는 문자적으로 풀이하자면 "마음 속에 떠오르는 어떤 상념이나 이미지를 보는 것"을 말합니다. 관상 수행자들은 무지와 공허와 흑암 가운데서 뭔가를 보려고 하고, 만나려고 합니다. 그래서 관상기도를 가르치는 자들은 관상을 할 때에는 어떤 이미지를 떠올리는 시각화 기법을 사용하라고 가르칩니다.
 
예를 들어, 관상기도 인도자가 "지금부터 예수님과 함께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겠습니다. 언덕이 가파릅니다. 저 멀리 강도들이 달린 십자가가 보입니다" 라고 말하면, 참가자들은 모두 눈을 감고 그 장면을 머리 속으로 그리며, 주변의 풍경도 상상하며, 군중들의 소리가 들리는 것처럼 느끼려고 해야 한다는 겁니다. 이는 마치 최면술사가 피시술자에게 "당신은 꽃밭에 있습니다. 꽃이 아름답지요? 이제 당신은 나비가 되었습니다. 자유롭게 하늘하늘 날아갑니다. 당신이 좋아하는 꽃에 내려앉았습니다. 당신은 지금 달콤한 꿀을 빨고 있습니다." 등과 같은 암시를 주어서 최면에 빠뜨리는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관상 기도는 이성의 통제나 건전한 비판력을 상실한 사람들이 인도자가 던지는 시각적 묘사나 암시에 의해 집단 최면에 걸려서 헛된 것을 보고 듣고 느끼며 가상의 어떤 영적인 체험을 하게 만듭니다. 그런 자기 암시 상태에서 자기 머리 속에 떠오르는 생각과 이미지가 과연 주의 음성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자기 속에 있는 인간적인 욕심과 망상이 사탄의 자극에 의해 표출된 것에 불과합니다. 또한 관상 기도 수행자들은 관상(시각화)을 통해 이미 죽은 자들과 교류하는 것을 가르치기도 하며, 자기가 원하는 어떤 결과를 얻고자 한다면 그것을 시각화시켜서 상상하라고 가르칩니다.
 
 "성경 책과 노트를 내려 놓고, 두 눈을 감고 여러 분의 마음 속의 모든 생각을 비우십시오. 이제 당신이 산에 있는 아름답고 평화로운 목장에 있다고 상상하십시오. 아름다운 푸른 풀과 노란 꽃이 보입니까?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가서 원하는 것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숲을 지나 당신의 목장으로 걸어오는 것이 보입니까? 당신을 향한 그의 사랑을 느끼십시오. 평안을 느끼십시오. 그 분의 눈을 바라보고 그가 당신에게 가진 사랑을 보십시오."
 
이것은 내적치유를 주장하는 존 윔버의 말인데, 등장인물만 예수로 했을 뿐 실상 관상 수행자들이나 오컬트주의자들의 관상(시각화) 기법, 뉴에이지 사상가들이 말하는 "생각의 힘"과 같은 사상을 담고 있습니다. 그들은 사람이 자기에게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어떤 모습을 관상하면, "말하는대로, 생각하는대로 이루어진다"라고 합니다. 어느 이동통신사 광고에 나오는 "생각대로 T", "비비디 바비디 부"와 별다를 게 없습니다.
 
이는 인간이 위대한 존재이며, 인간의 상상에 창조적 능력이 있으며, 상황을 바꾸고 문제를 해결하는 힘이 있다는 뉴에이지 사상에 뿌리를 둔 것으로서, 초월 심리학이나 신경-언어 프로그래밍(Neuro-Linguistic Programming) 이론 등을 기초로 하고 있습니다. 요즘 유행하는 긍정적 사고, 적극적 사고방식 등의 처세술 책자에서 "자기가 원하는 결과를 머리 속으로 자꾸 시각화해서 상상하면 그대로 이루어진다"라고 하는 가르침 역시 이런 사상에서 나온 것들입니다.
(http://yeonmiso.com.ne.kr/tibet/imagpwer.htm 티벳 명상, 수행에 있어서 상상력의 위력)
 
문제는 이런 뉴에이지 사상에서 나온 시각화(관상)기법을 엉뚱하게도 성경 말씀과 연결시켜 일부 영적으로 타락한 종교지도자들이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잘 된다", "무엇이건 네 믿음대로 된다", "그것을 머리 속으로 그리고, 꿈꾸고 보려고 하라", "입으로 선포하라. 네가 말한대로 된다"는 식으로 가르치고 있으니 참으로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런 거짓 가르침 때문에 일부 성도들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며 순종하려고 하기보다는, 자기 욕심과 죄악된 마음에서 우러나온 낙관적이고 희망찬 상상만 붙잡고, 헛된 미래상만 머리 속으로 그려내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신념이나 상상에 어떤 능력이 있다고 가르친 적이 없으며, 머리 속으로 헛된 꿈을 키우라고 하신 적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에 근거한 것이 아닌 헛된 상념이나 어떤 시각화된 형상(image)을 머리 속으로 그려내는 것은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과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그런 자들은 주의 말씀이 아니라 자기의 죄악된 마음 속에서 나오는 헛된 상념만 잔뜩 키우게 될 뿐입니다.
 
(렘 23:16, 킹흠정) 만군의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에게 대언하는 대언자들의 말들에 귀를 기울이지 말라. 그들은 너희를 헛되게 만드는 자들이니 그들은 주의 입에서 나오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에서  나온 환상 계시를 말하느니라.
 

로마카톨릭에서 가르치는 관상 기도가 언제부터인가 영성훈련이라는 이름을 쓰고 교회에 침투해 들어오고 있지만, 이는 결코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것이 아닙니다. 어떤 큰 교회의 목사가 관상 기도를 가르친다거나 어느 교단의 총회장이 이를 도입한다고 할 지라도, 관상 기도와 같이 성경 말씀의 진리에 위배되는 것은 단호히 배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비롯하여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람들은 한 번도 관상 기도와 같은 수행법을 행한 적도 없고, 가르친 적도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관상 기도란 고대 바빌론의 신비종교에 뿌리를 둔 로마카톨릭의 가르침과 하나님을 대적하는 뉴에이지 사상에 기초한 것으로 이방 종교 수행자들이 마귀에게 속한 악한 영들과 접하는 의식이지, 성경의 가르침과는 어긋나는 것입니다.扈ⓗ

 

 

 


출처 : 성막 황금의집
글쓴이 : 조각목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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