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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마카베오서

그리스도의 군사 2015. 4. 2. 10:57

마카베오서

 

1. 어떤 책인가

구약시대와 신약시대를 연결시켜주는 마카베오서는 구약의 마지막 역사서로서 희랍문화가 번성하던 시기에 안티오쿠스 4세가 선동한 헬레니즘과 종교 박해에 대항하여 싸우는 이스라엘에 관해서 기록하고 있다.

 

2. 저자 및 쓰여진 시기는

, 하권은 각기 다른 저자가 다른 관점에서 엮은 작품으로 상권은 그리스도 탄생 100여년 전에 하스모네아가(家)의 한 추종자에 의해 쓰여졌다.

 

3. 왜 썼는가

시리아의 왕 안티오쿠스 4세의 종교박해와 헬레니즘(희랍의 정치적 문화적 영향)에 대항하여 먼저 백성들을 회개하도록 이끌며, 모든 위협에 대해서도 하느님께 대한 굳은 신뢰만이 이스라엘이 살 길임을 되새긴다.

 

4. 어떤 이야기가 쓰여져 있나

<상권>

모두 16장으로 시리아왕 안티오쿠스 에피파니우스 즉위 때부터 시몬의 죽음까지 40년간 즉 기원전 175∼134년까지의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1) 마카베오 전쟁의 시작과 배경 : 에집트를 정복한 후 예루살렘을 침입한 안티오쿠스 4세는 성전을 무참히 짓밟고 약탈을 일삼으며 많은 사람들을 죽인다. 또한 한 국민이 되어야 한다는 이유로 이교도 관습을 따를 것과 함께 유다교 탄압정책을 편다. 율법에 충실한 많은 유다인들이 사제 마따디아와 합세하고 박해자들이 안식일을 이용하여 대학살을 감행하자 군대를 조직하고 항쟁할 것을 그의 아들들과 함께 결의한다.

(2) 유다 마카베오의 행적 : 마다디아의 뒤를 이은 유다 마카베오는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성전을 정화하고 예배를 드린다. 유다 마카베오는 혹독한 압박을 당하는 자기 민족을 구출하기 위한 수많은 전투를 승리로 이끈다. 그러나 그는 베레아 전투에서 영웅적인 투사들과 더불어 전사한다.

 (3) 요나단의 행적 : 요나단이 유다의 뒤를 이어 항쟁을 계속해 나간다. 그는 정면충돌을 피하고 탁월한 정치적 수단을 발휘하는데 안티오쿠스의 왕위 계승 암투에 휘말리지 않고 로마, 스파르타와 동맹을 맺는 등 소신있게 대처해 나가며 자기 가문이 외국인에게 반기를 들었던 본래의 목적대로 유다인의 종교, 정치적 자유를 쟁취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는 트리폰의 계교에 빠져 피살된다.

(4) 시몬의 행적 : 요나단의 뒤를 이은 시몬은 독립전쟁에서 쓰러진 형제들의 희생과 정치적 수단의 결실을 맺게된다. 시몬은 시리아의 데메드리오에게 접근하여 인정을 받게 되고 마침내 유다는 독립을 쟁취하고 자유를 얻게 된다. 또한 예루살렘도 되찾게 되고 전국민으로부터 정식으로 대사제 및 통치자로 인정받는다. 그러나 사위 프로톨레메오의 반역으로 시몬과 그의 두아들은 피살된다.  

<하권>

상권보다 먼저 저술된(BC 124년) 마카베오 하권은 다섯권으로 된 야손의 책을 요약한 것으로 저자는 율법과 성전, 기도를 강조함으로써 하느님의 영광과 성전의 존귀함을 강조한다.

하권은 모두 15장으로 안티오쿠스 4세의 박해와 마카베오를 중심으로 한 저항운동을 기록하였다.

(1) 에집트 유다인에게 보내는 편지와 대사제들의 만행(1∼4장) : 팔레스티나 유대인들은 에집트에 사는 동포들에게 성전 정결 예식과 율법을 준수하도록 촉구하는 편지를 보낸다. 이 편지에서 안티오쿠스 4세의 박해와 대사제들의 권력다툼을 묘사하고 이러한 위기에서 성전 정결 예식은 민족을 구해주신 하느님께 드리는 감사의 축제임을 이야기하고 있다. 부정한 수단으로 대사제가 된 시몬, 야손, 메넬라오스, 리시마코스 등은 자신의 영예를 위해 민족을 배반하여 성전모독, 대사제직을 둘러싼 매관 매직과 흉계 살인등을 일삼는다.

(2) 헬레니즘의 강요와 박해(5∼7장) : 안티오쿠스 왕이 에집트 원정을 시작한 틈을 타 야손은 주권을 장악하기 위해 예루살렘을 기습하고 자기 동포를 학살한다. 한편 안티오쿠스왕은 이것을 유다인의 반란으로 생각하고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성전 약탈, 안식일 학살, 이교예식의 강요 등 본격적인 박해를 시작한다. 그러나 저자는 이 징벌이 오히려 하느님의 채찍질임을 일깨우고, 죽음으로 신앙을 지킨 율법학자 엘르아잘과 어느 어머니와 그의 일곱아들의 순교를 소개함으로써 순교와 육신의 부활에 대한 신앙을 기록하고 있다.

(3) 유다이즘의 승리와 유다의 승전(8∼11장) : 유다 마카베오는 군대를 조직하고 항전을 시작한다. 유다 마카베오와 그의 부하들은 '하느님의 도우심'이라는 표어를 내걸고 율법과 조국을 위해 니가노르와 디모테오와의 교전에서 승리한다. 한편 극도의 혼란에 빠진 안티오쿠스는 죽음의 고통 속에서 하느님 앞에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예루살렘의 자유를 선포한다. 이로써 성전과 예루살렘을 탈환하여 성전을 정화하고 봉헌 축제를 제정하여 성전 예배를 부활시킨다.

(4) 다시 시작되는 박해와 부활 신앙(12∼15장) : 니가노르, 디모테오, 아폴로니우스, 히에로니모스, 데모폰 등에 의해 다시 일어난 박해에 대항하여 정의의 심판관이신 하느님께서 싸움의 인도자가 되시어 유다를 승리로 이끈다. 그리고 죽은 자들에 대한 부활의 확신을 가지고 전쟁에서 전사한 이들을 위한 속죄의 제사를 드린다. 또한 유다는 계시의 영상을 통해 나타난 대사제 오니아스가 유다인을 위해 기도하고 있음을 전하는데 그 당시 이미 전구의 효험과 성인들의 통공에 대한 믿음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마카베오서


Ⅰ. 들어가는 말


  우리는 먼저 이 마카베오서란 책이름이 주는 의미와 유래에 대해 알아보고 각권의 세부적인 상황을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따라서 따로 지면을 할애하지 않고 여기서 간략히 기술하는 것으로 들어가는 말을 대신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이 책 이름이 가지고 있는 의미와 우리에게 주는 그것이 여전히 그만큼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며, 또한 그 필요성도 참고 과정의 하나로서 여겨지고 있기 때문이다.

  주전 2세기부터 주후 1세기 사이에 기록된 이 책들을 통칭하는 용어인 이 외경에 마카베오 상하(1, 2서)가, 정경과 외경에도 속하지 않는 책들을 지칭하는 용어인 위경(Pseude- pigrapha)에 마카베오 3, 4서가 실려 있다. 여기서 외경이란 여러 가지 이유1)로 정경에 포함되지 못한 책들을 의미하는 것이며, 개신교에서 말할 때에 그것은 바로 15권의 구약외경을 말하는 것이다.2) 

  그 중에서 이 마카베오서라는 책 이름은 그 유대민족의 영웅이자 반란군의 총 지휘자인 유다의 별칭으로 되어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마카베오 상’을 ‘마카베오 일가의 사건에 관한 서적’으로, ‘마케베오 하’를 ‘마카베오 일가의 사건 개요’라고 구분하여 불렀으며, 시프리안은 구분 없이 라틴어 명칭인 마카바에이(Machabaei)로, 유세비우스도 종종 구분 없이 ‘마카베오 일가의 사건에 관한 성서’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그리이스 사본들은 마카비온 알파와 마카비온 베타로 구분하고 있다.

  한편, 마카베오 삼사서는 또 다른 두 권의 책을 가리키는데, 이것들은 그 본래 이름의 범위를 넓혀서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의 통치 시대에 신앙 때문에 시리아, 팔레스틴 지역의 고난 당한 자들, 혹은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필로파토르의 통치 초기에 있었던 종교 박해를 받았던 사람들 등을 마카베오라고 부르고 있다.

  이 정도의 기본적인 내용을 가지고 이제 각 권별로 살펴보기로 하겠다. 그 기본 내용은 참고 문헌들의 그것에 충실하게 정리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본 글의 성격상 별도의 역사적인 사건 혹은 배경에 대해서는 따로 상술하지 않고자 하니 이점 참고하길 바란다. 이는 주어진 주제에 보다 집중하고자 함이다.             

     

Ⅱ. 마카베오서


ⅰ) 마카베오 1서

  이 책의 본래 명칭은 ‘하스몬 일가의 실록’이라고 하는 것이 적절한데, 왜냐하면 이 책이 단지 마카베오만의 투쟁이 아니라 그 형제들의 투쟁에 관해서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으며 그들의 아버지인 마따디아가 하스모네우스란 이름을 가진 자의 후손이기 때문이다. 또한 초기 히브리어와 아람어 작품에 ‘하스몬 일가’란 용어가 사용되고 있는 점도 이러한 것을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그 내용부터 살펴보면, 동방세계를 헬라가 지배하게 된 경위(1:1-9)를 간략하게 설명한 다음, 셀레우코스 왕조의 왕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에 대해 전투를 벌이게 된 배경을 짧게 서술하고 있다(1:10-64). 이어 마따디아와 그의 다섯 아들이 지휘하게 된 발단(2장)과 마따디아의 아들 유다(3:1-9:22), 요나단(9:23-12:53), 시몬(13:1-16:17)의 군사적 및 정치적 생애를 상세히 적고 있다. 끝으로 시몬의 아들 요한의 통치에 대해 간략하게 요약함으로써 대미를 장식하고 있다. 그 구조를 크게 다섯 부분으로 나누면 다음과 같다:


  a. 첫째 부분: 이스라엘의 위기(1장)

  b. 둘째 부분: 마따디아의 저항(2장)

  c. 셋째 부분: 유다의 투쟁(3:1-9:22)

   aa) 유다에 대한 찬양(3:1-9)

   bb) 안티오쿠스 4세 부하들과의 싸움(3:10-4:35)

   cc) 예루살렘 성전의 정화와 재봉헌(4:36-61)

   dd) 인근 적들과의 전쟁(5장)

   ee) 안티오쿠스 4세의 죽음과 리시아와의 싸움(6장)

   ff) 데메드리오 1세와의 갈등(7장)

   gg) 로마와의 조약(8장)

   hh) 유다의 전사(9:1-22)

  d. 넷째 부분: 요나단의 투쟁(9:23-12:53)

   aa) 바키데스와의 전쟁(9:23-73)

   bb) 알렉산더 에피파네스와의 관계(10:1-11:19)

   cc) 데메드리오 2세와의 관계(11:20-12:38)

   dd) 트리폰과의 전쟁(12:39-53)

  e. 다섯째 부분: 시몬의 활약(13장-16장)

   aa) 트리폰 및 데메드리오 2세와의 관계(13:1-14:3)

   bb) 시몬의 통치(14:4-49)

   cc) 안티오쿠스 7세와의 관계(15:1-16:10)

   dd) 시몬의 최후와 그의 아들 요한(16:11-24) 


  그렇다면 그 메시지는 무엇인가?: 마카베오 1서는 자기의 백성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가 헬라 시대에도 계속되었음을 가르친다. 본문이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을 배경으로 하는 유대 역사를 그리고 있으며, 공식적인 편지 왕래의 인용문에 에스라와 느헤미야에 대한 회상이 나타나기 때문에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속편으로 간주되어진다. 구속의 역사가 계속되고 있다는 믿음을 강조함으로써 유대인들을 격려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예언시대가 종말을 고했다고 할지라도, 사람들은 여전히 신명기 18:15;183)이 예고하고 있는 장차 오실 ‘예언자’를 기다린다. 그가 나타날 때까지 시몬과 그 후계자는 잠정적인 영도자가 된다(14:414)). 여기서 이스라엘이 하나의 국가로 재등장하는 것은 메시야 시대를 예견하게 하는 현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카베오 일가가 비난을 받는 것은 그들이 종교의 자유를 성취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웃 이방인들에 대한 침략을 감행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고대 이스라엘의 국경선을 회복하는 것이 그들의 운명이라고 주장했다(15:335)). 결국 마카베오 1서는 이 지역들에 대한 유대인의 정복을 언급하면서 이 지역의 고대 이름들을6) 의미심장하게 사용하고 있다.


  다음으로 B.C. 110년경에 기록된 것으로 보이는 이 책에 나오는 연대기는 ‘그리스 왕국 137년’이라는 구절에 의해 결정되는데(1:107)), 요세푸스에 따르면, 이 시기는 바로 시리아 왕국 시대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마카베오 1서의 저자는 시몬의 아들 요한을 부추기면서, 족장과 같은 지도자 마따디아에서 시작하여 시몬의 세습적인 통치에서 절정에 오른 하스몬 일가의 공식적인 역사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다루어지는 역사는 분파적이 아닌데, 이것의 의미는 곧 사두개인이나 바리새인 어느 쪽의 견해도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달리 말하자면, 마카베오 1서는 바리새인과 히르카누스의 공개적인 분열이 있기 전에 기록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사두개인의 견해에 대해 공조하면서 이들을 공격하는 교리를 피하고 있지만 동시에 모든 마따디아의 아들들은 율법에 대해 관심이 많으며 이교도를 철저히 배격하는 사람들로 묘사된다.

   이 책에서 유대인의 민족적인 야망과 예수에 의하여 구체화된 보편적인 하나님의 나라 사이의 대조가 확연히 드러나는데, 그것은 마카베오 1서가 구약의 계약시대에 속하기 때문이다. 이 구약의 계약은 우리가 믿고 있는 것처럼 장차 오실 예언자에게서 끝나는 것이며 초대 교회에서 이 장차 오실 예언자가 바로 예수님이셨던 것이다.    


 * 주요 사건들

 주전 175년 - 안티오쿠스 4세의 통치 시작 

   주전 167년 - 예루살렘 성전에서 이교제사가 올려짐. 마따디아의 저항 시작

   주전 166년 - 유다 마카비가 마따디아를 계승함

   주전 164년 - 성전 재봉헌식 거행. 안티오쿠스 4세가 페르시아에서 사망

   주전 162년 - 유다 마카비가 종교의 자유를 획득함

   주전 160년 - 요나단이 유다를 계승함

   주전 152년 - 요나단이 대제사장이 됨

   주전 142년 - 시몬이 요나단을 계승함. 시몬이 세금면제 혜택을 얻음.

   주전 134년 - 시몬이 죽고 요한 힐카누스가 계승함.   

 

구약성서의 제2경전에 속하는 경전. 가톨릭에서는 정경()에 포함하지만, 유대교와 개신교에서는 외경() 또는 위경()으로 본다.

 

본문
마카비·마카베아라고도 한다. 보통 다음의 4서()가 알려져 있는데, 가톨릭에서는 1545년 트리엔트공의회 이후 마카베오 1서와 2서를 정경()으로 인정하고 구약성서에 포함시키고 있다.

⑴ 마카베오 1서:그리스어역()만이 전해진다. 시리아왕()
안티오코스 4세 즉위(BC 175)로부터 시리아에서 독립을 이끌어낸 마카베오가() 시몬의 죽음(BC 135)까지 40년 동안의 역사를 기록한 것이다. 16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한국 공동번역성서에는 《마카베오기 상권》으로 수록되어 있다. 알렉산드로스 사망 후 마케도니아 왕국이 분열하자, 안티오코스 4세(에피파네스)는 친()그리스정책을 취함으로써 유대인들의 반감을 샀고, 이는 마카베오전쟁의 원인이 되었다. 이 책은 주로 그 전쟁이야기가 소재로 되어 있다.

⑵ 마카베오 2서:
키레네의 야손에 의한 5권의 역사서를 요약한 것이다. 그리스어로 씌어졌으며, BC 176∼BC 161년경의 유대의 역사이다. 1서에 비하여 종교적 색채가 강하며 15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8장 이후의 후반부는 앞의 마카베오1서와 내용이 거의 중복된다. 저자·연대 미상이며, 한국 공동번역성서에는 《마카베오기 하권》으로 수록되어 있다. 이상의 2권은 트리엔트공의회 이후 가톨릭에서는 정경으로 인정하여 불가타역() 성서에 포함하였으나, 유대교개신교에서는 여전히 외경 또는 위경으로 간주한다.

⑶ 마카베오 3서:
프톨레마이오스 4세 때 이집트유대인 압박을 소재로 하여 소설체로 쓴 것인데, BC 217년 알렉산드리아가 썼다.

⑷ 마카베오 4서:다른 마카베오서와는 달리 철학적 색채가 강한 내용이다. 경건한 이성()이 충동[]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등
스토아학파의 영향이 짙다. 이상의 3·4서는 가톨릭에서도 정경에 포함하지 않는다

 

마카베오서와 하스몬 왕조

 

 

마카베오 가문은 어떤 가문이었는가?


많은 사람에게 있어서 마카베오 시대는, 구약 성경의 마지막 책이 완성된 때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때까지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려 주는 블랙 박스와도 같습니다. 비행기가 추락할 경우 블랙 박스를 조사해 보면 특정한 세부 사항들이 밝혀지는 것처럼, 마카베오 시대 즉 유대 민족의 변화와 격동의 시기를 자세히 살펴보면 어느 정도 통찰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마카베오 가문은 어떤 가문이었습니까? 그들은 예언된 메시아가 오기 전에 유대교에 어떤 영향을 미쳤습니까?—다니엘 9:25, 26.

  

해일처럼 밀려온 헬레니즘

 

알렉산더 대왕은 그리스에서부터 멀리 인도에 이르는 지역을 정복하였습니다. (기원전 336-323년) 그의 광대한 왕국은 헬레니즘 즉 그리스의 언어와 문화가 전파되게 하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알렉산더 휘하의 관리들과 군사들은 현지 여성들과 결혼하였고 그로 인해 그리스 문화와 다른 나라의 문화가 융합되었습니다.

 

알렉산더가 죽자, 그의 왕국은 그가 거느리고 있던 장군들에 의해 분할되었습니다. 기원전 2세기 초, 시리아를 다스리던 그리스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3세는 이집트를 통치하던 그리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게서 이스라엘을 빼앗았습니다. 이스라엘에 있는 유대인들은 그리스의 통치를 받음으로 인해 어떤 영향을 받았습니까?

  

한 역사가는 이렇게 썼습니다. “유대인들이 헬레니즘화된 이웃 민족들과의 접촉을 피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고 외국에 사는 자기 동포들과의 접촉은 더더욱 피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그리스의 문화와 사고 방식이 흡수될 수밖에 없었다. ··· 헬레니즘 시대에는 숨만 쉬어도 그리스의 문화가 흡수되었다!” 유대인들은 그리스식 이름을 사용하였습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었을 뿐 그들은 그리스의 관습과 의상을 받아들였습니다. 유대인들을 동화시키려는 미묘한 힘이 작용하고 있었습니다.

  

제사장들의 부패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기가 매우 쉬운 유대인들 중에는 제사장들도 있었습니다. 많은 제사장들이 생각하기에 헬레니즘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시대의 조류에 맞게 유대교가 발전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을 의미하였습니다.

  

그러한 유대인 중 한 사람으로 대제사장 오니아스 3세의 동생인 야손(히브리어 이름은 여호수아)이 있었습니다. 오니아스가 안티오크에 가 있는 동안, 야손은 그리스 당국에 뇌물을 바쳤습니다.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야손은 오니아스 대신 자신을 대제사장으로 임명해 달라고 청탁하였던 것입니다.

  

그리스 셀레우코스 왕조의 통치자,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기원전 175-164년)는 그 제의를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그리스의 통치자들은 그 때까지 유대인의 대제사장직에는 간섭하지 않았지만, 안티오코스에게는 군자금이 필요하였던 것입니다. 또한 그는 좀더 적극적으로 헬레니즘화를 장려할 유대인 지도자를 갖게 된 것이 기뻤습니다.

안티오코스는 야손의 요청에 따라 예루살렘에 그리스 도시(폴리스)와 동등한 지위를 부여하였습니다. 그러자 야손은 체육관을 만들어 젊은 유대인들과 심지어 제사장들까지도 그 곳에서 경기를 하게 하였습니다.

  

배신은 배신을 낳았습니다. 3년 후, 제사장 가문에 속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메넬라오스가 더 많은 뇌물을 바쳤고 야손은 도망하였습니다. 메넬라오스는 안티오코스에게 돈을 주기 위해 성전 보고(寶庫)에서 거액의 돈을 빼돌렸습니다. 오니아스 3세(안티오크에 유배된 상태)가 이 일을 공개적으로 비난하자, 메넬라오스는 그를 살해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안티오코스가 죽었다는 소문이 퍼지자, 야손은 1000명의 부하를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메넬라오스에게서 대제사장직을 빼앗으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안티오코스는 죽지 않았습니다. 안티오코스는 야손이 그런 행동을 했으며 자신의 헬레니즘화 정책에 반대하는 유대인들이 폭동을 일으켰다는 소식이 들리자, 보복 조처를 취하였습니다.

  

안티오코스가 조처를 취하다

  

모셰 펄먼은 자신의 저서 「마카베오가(家)」(The Maccabees)에서 이렇게 기술합니다. “명확한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안티오코스는 유대인들에게 종교적인 자유를 허용한 것이 정치적인 실수였다고 결론 내린 것 같다. 그가 보기에 가장 최근에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반란은 순수하게 종교적인 동기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유대 지역에 팽배해 있던 친이집트적인 분위기에서 나온 것이었으며, 그런 정치적 감정이 위험한 방법으로 표출된 이유는 바로 자신의 백성 중에서 유독 유대인들만이 상당히 많은 종교적 분리를 얻어 내기 위해 노력했고 또 그것이 허용되었기 때문이었다. ··· 그는 그것을 중단시켜야겠다고 생각하였다.”

  

이스라엘의 정치가이자 학자인 아바 에반은 그 후에 일어난 일을 다음과 같이 요약합니다. “[기원전] 168년과 167년에는 유대인들이 학살당하고 성전이 약탈당하고 유대교의 관습이 금지되는 사태가 연거푸 발생했다. 할례를 받으면 사형에 처해질 수 있었으며, 안식일을 지키는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최대의 치욕적인 일은 167년 12월에 있었다. 그 때 안티오코스의 명령으로, 성전 안에 제우스의 제단이 세워졌으며 유대인들은 그리스인들의 신에게 돼지고기—유대인의 율법에 의하면 물론 부정했음—를 바치도록 요구받았다.”  이 기간에 메넬라오스와 헬레니즘화된 그 밖의 유대인들은 이미 더럽혀진 성전에서 여전히 자기 위치를 지키며 직무를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헬레니즘을 받아들였지만, 하시딤—경건한 자들—으로 자처하는 신흥 집단은 모세의 율법을 더 엄격하게 지킬 것을 촉구하였습니다. 헬레니즘화된 제사장들에게 이제 혐오감을 느낀 일반 대중은 점점 더 하시딤 편을 들었습니다. 전국에 있는 유대인들이 이교 관습에 순응하고 제사에 참여하든지 아니면 죽음을 택하든지 양자택일을 하도록 강요당하자 한동안 순교가 잇달았습니다. 경외서인 마카베오를 보면, 타협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한 남녀와 어린이들에 대한 기록이 많이 나옵니다.

  

마카베오가의 반격

  

안티오코스가 극단적인 조처를 취하자 많은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종교를 위해 싸우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 북서쪽 현대의 로드 시 근처의 모디인에 사는 마타시아스라는 제사장은 도시의 중심부로 나오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마타시아스가 그 지방 주민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왕의 대표자는 그를 설득하여 이교 제사에 참여하게 함으로 마타시아스가 자신의 목숨도 구하고 주민들이 따를 본도 세우게 하려고 하였습니다.

 

마타시아스가 그렇게 하기를 거부하자, 한 유대인이 타협하려고 앞으로 나왔습니다. 그러자 의분에 가득 찬 마타시아스가 무기를 움켜쥐더니 그를 죽였습니다. 그리스 군사들은 이 연로한 사람의 격한 반응에 어리둥절해진 나머지 잠시 멈칫거렸습니다. 순식간에 마타시아스는 그 그리스 관리도 죽였습니다. 마타시아스의 다섯 아들과 그 도시의 주민들은 그리스 군사들이 미처 방어하기도 전에 그들을 제압하였습니다.

 

마타시아스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율법에 대한 열심이 있는 사람은 모두 나를 따르시오.’ 마타시아스와 그의 아들들은 보복을 당하지 않기 위해 구릉 지대로 도피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행동에 관한 소문이 퍼지자 유대인들(많은 하시딤이 포함됨)이 그들에게 가담하였습니다.

 

마타시아스는 아들인 유다를 군사 작전 책임자로 임명하였습니다. 유다는 “망치”를 의미하는 마카베오라고 불리게 되었는데, 아마 유다의 탁월한 군사적 재능 때문일 것입니다. 마타시아스와 그의 아들들은 하스몬가(家)라고도 불렸는데, 이 이름은 헤스몬이라는 도시나 그런 이름을 가지고 있었던 조상에게서 유래한 것입니다. (여호수아 15:27) 하지만 반란 중에 유다 마카베오가 탁월한 인물로 부상하면서 그 가문 전체가 마카베오가(家)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성전을 탈환하다

 

반란 첫해에 마타시아스와 그의 아들들은 소규모 군대를 조직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 군대는 안식일에 하시딤 전사들로 이루어진 무리를 두 번 이상 공격하였습니다. 하시딤 전사들은 자신을 방어할 능력은 있었지만 안식일을 범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대량 학살이 벌어졌습니다. 당시 종교 문제의 권위자로 여겨지고 있던 마타시아스는 유대인들이 안식일에도 자신을 방어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 결정으로 인해 저항 운동은 새로운 활기를 띠게 되었으며 종교 지도자가 상황 변화에 알맞게 유대교의 율법을 적용하도록 허용하는 유대교의 관례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탈무드도 이러한 추세를 반영하여 나중에 이렇게 기술합니다. “여러 번의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기 위해 한 번의 안식일을 범하는 것은 허용한다.”—요마 85b.

 

연로한 아버지가 사망하자 유다 마카베오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반란군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탁트인 평지 전투에서는 도저히 적을 무찌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현대의 게릴라전과 비슷한 새로운 전법을 고안해 냈습니다.

 

그는 일반적인 방어 전술을 사용할 수 없는 곳에서 안티오코스의 군대를 공격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유다는 일련의 전투에서 자신의 군대보다 수적으로 압도적인 우위에 있던 군대를 계속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제국 내에 경쟁자들이 있는데다 로마의 세력이 부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셀레우코스 제국의 통치자들은 반유대인 법령을 시행하는 일에 관심을 덜 갖게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유다는 예루살렘 성문까지 진격해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기원전 165년 (어쩌면 164년) 12월에, 유다와 그의 군대는 성전을 탈환하여 성전 기구들을 깨끗하게 한 다음 재봉헌하였습니다. 성전이 더럽혀진 지 꼭 3년 만의 일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해마다 하누카 즉 수전절이 되면 이 사건을 기념합니다.

  

종교심보다 정치적 동기가 앞서다

  

반란의 목적은 달성되었습니다. 유대교 관습에 대한 금지령이 해제되고 성전에서 숭배와 희생을 드리는 일도 재개되었습니다. 이제 만족을 느낀 하시딤은 유다 마카베오의 군대를 떠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유다에게는 다른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잘 훈련받은 군대가 있었는데 유대인의 독립 국가를 세우는 데 이 군대를 사용하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었겠습니까? 반란의 원동력이 된 종교적 대의가 이제는 정치적인 동기로 대치되었습니다. 따라서 항쟁은 계속되었습니다.

  

셀레우코스 왕조의 지배에 맞서 싸우도록 지원해 줄 세력을 찾던 유다 마카베오는 로마와 조약을 맺게 되었습니다. 그는 기원전 160년에 벌어진 전투에서 죽었지만 그의 형제들이 투쟁을 계속해 나갔습니다. 유다의 동생 요나단은 여전히 셀레우코스 왕조가 통치를 하지만, 그 왕조의 통치자들이 자신을 대제사장 겸 유대의 통치자로 임명하는 데 동의하도록 상황을 몰고 갔습니다.

  

요나단이 시리아인들의 계략에 속아넘어가는 바람에 붙잡혀서 죽임을 당하자, 그의 형 시몬이 마카베오의 형제로서는 마지막으로 그 뒤를 계승하였습니다. 시몬은 기원전 140년 9월에 예루살렘에서 중요한 포고령을 발표되었는데, 그 포고령은 그리스 식으로 청동판에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 포고령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데메트리우스 왕[그리스 셀레우코스 왕조의 통치자]은 그[시몬]가 대제사장임을 확언하였고, 그를 자신의 친구로 삼았으며, 그에게 큰 영예를 돌렸다. ··· 유대인들과 유대 제사장들은, 믿을 수 있는 예언자가 일어날 때까지, 시몬이 영원무궁토록 그들의 지도자이자 대제사장이 되어야 한다고 결정하였다.”—마카베오 상 14:38-41 (경외서에 포함되는 역사서).

  

따라서 외부의 영향력인 그리스 셀레우코스 왕조만이 아니라 시몬의 동포들로 이루어진 “총회” 역시 그와 그의 자손들이 통치자 겸 대제사장의 지위를 갖는 것에 동의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역사가인 에밀 쉬러의 말에 따르면, 일단 하스몬 가가 정치적인 왕조를 설립하고 나자, “그들의 주된 관심사는 토라[유대의 율법]를 실천하는 것에서 자신들의 정치 권력을 보존하고 확대하는 것으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시몬은 유대인들의 민감한 감정을 건드리지 않으려고 조심하면서, “왕” 대신에 “백성의 지도자”를 의미하는 “에스나크”라는 칭호를 사용하였습니다.

  

셀레우코스 왕조의 지배는 (기원전 141년에) 시몬의 통치 아래 완전히 자취를 감췄습니다. 시몬은 로마와 다시 동맹을 맺었으며, 그리하여 마카베오 가문에 의해, 독립된 하스몬 왕조가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시몬은 자신이 지배하는 영토를 넓히기 위해 전쟁을 계속하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통치는 갑자기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와 그의 두 아들이 예리코 근처에서 잔치를 벌이고 있을 때 그의 사위인 프톨레마이오스가 그들을 암살하였던 것입니다.   

 

왕위를 찬탈하려던 그러한 시도는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시몬의 또 다른 아들 요한 히르카누스가 그를 죽이려는 시도에 대해 사전에 경고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을 암살하려던 사람들을 붙잡았으며, 아버지를 대신하여 통치권과 제사직을 차지하였습니다.  

 

처음에 요한 히르카누스는 시리아 군대로부터 심각한 위협을 받았지만, 기원전 129년에 그리스 셀레우코스 왕조는 파르티아 사람들과의 중요한 전투에서 패배하였습니다. 유대인 학자 메나헴 스테른은 그 전쟁이 셀레우코스 왕조에 미친 영향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그 왕국의 체제 전체가 사실상 붕괴되었다.”

  

따라서 히르카누스는 “유대의 정치적 독립을 완전히 회복시키고 사방으로 영토를 확장하기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참으로 영토를 많이 확장하였습니다.

  

이제 시리아의 위협에서 벗어난 히르카누스는 유대 주위 지역들을 침공하여 정복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정복당한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유대교로 개종해야 했으며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들이 살던 도시는 철저히 파괴되었습니다.

  

그러한 전투 중 하나는 이두매(에돔) 사람들을 상대로 한 것이었습니다. 스테른은 그 전투에 대해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이두매 사람들의 개종은 그러한 방식의 개종으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몇몇 사람이 아니라 민족 전체가 개종하였기 때문이다.”

  

정복된 다른 지역들 중에는 사마리아도 있었는데, 그곳에서 히르카누스는 그리심 산에 있던 사마리아 성전을 완전히 파괴하였습니다. 역사가 솔로몬 그레이젤은 하스몬 왕조의 강제 개종 정책이 지닌 모순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그는 마타티아스[유다 마카베오의 아버지]의 손자였으면서도 이전 세대가 그토록 숭고하게 옹호했던 바로 그 원칙 즉 종교의 자유를 범하였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등장

  

요세푸스는 히르카누스의 통치에 대해 기록하면서 처음으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영향력이 증가하는 것에 대해 논합니다. 그 전에도 요세푸스는 요나단의 통치 기간 중에 살던 바리새인들에 대해 언급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들이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록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바리새인들이 하시딤에서 나왔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시딤이란 유다 마카베오의 종교적 목표는 지지하였지만 그가 정치적 야망을 품게 되자 그에게 등을 돌렸던, 신앙심이 깊은 한 분파였습니다.

 

바리새인이라는 이름이 “해석하는 사람들”을 뜻하는 단어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 이름이 “분리된 자들”을 뜻하는 히브리어 어근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 대체적으로 인정되는 정설입니다.

 

바리새인들은 특별한 가문의 후손들이 아니라 평범한 가문 출신의 학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각별한 신앙심을 나타내야 한다는 철학을 통해 의식상의 불결함으로부터 자신들을 분리시켰으며, 제사장들이 성전에서 지켜야 할 거룩함에 대한 법을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평범한 상황에까지 적용시켰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성경을 해석하는 새로운 방식을 개발하였으며, 나중에 구전 법으로 알려지게 된 견해를 발전시켰습니다. 시몬의 통치 기간 중에 그들 중 얼마가 게루시아(연로자의 회)에 임명되면서 그들은 더 큰 영향력을 갖게 되었습니다. 게루시아는 나중에 산헤드린으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요세푸스는 요한 히르카누스가 처음에는 바리새인들의 제자이자 지지자였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어느 때인가 바리새인들은 히르카누스가 대제사장직을 포기하지 않는 것에 대해 그를 비난하였습니다. 그 때문에 그들의 관계가 갑작스럽게 완전히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히르카누스는 바리새인의 종교 규정들을 법으로 금지시켰습니다. 또 다른 제재 조처로서, 그는 바리새인들의 종교적 적대자들인 사두개인들의 편이 되었습니다.

 

사두개인이라는 이름은 대제사장 사독과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사독의 후손들은 솔로몬 시대부터 대대로 제사직을 맡아 왔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두개인들이 다 사독의 후손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사두개인들은 나라의 귀족들로서 부유층 사람들이었으며, 일반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쉬프먼 교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 대부분은 ··· 제사장들이었거나 대제사장 가문의 사람과 결혼을 한 사람들이었던 것 같다.” 그러므로 그들은 오랫동안 권력층과 가까운 친분 관계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일반인들의 생활에서 바리새인들의 역할이 커지던 당시의 상황과 제사장의 신성한 생활을 모든 사람들에게 확대하려는 바리새인들의 사상은 사두개인들의 자연스런 권위를 약화시킬 수 있는 위협으로 비쳐졌습니다. 하지만 히르카누스의 통치 말년이 되자, 사두개인들이 다시 득세하게 되었습니다.

 

정치만 남고, 신앙심은 사라지다

 

히르카누스의 장남 아리스토불루스는 겨우 1년을 통치한 다음 사망하였습니다. 그는 이투레아 사람들에게 강제 개종 정책을 계속 시행하였으며 상부 갈릴리도 하스몬 왕조의 지배에 굴복시켰습니다. 하지만 하스몬 왕조의 권력은 아리스토불루스의 동생 알렉산더 자나이우스의 재임 기간 중에 최절정에 이르렀는데, 자나이우스는 기원전 103년부터 76년까지 통치하였습니다.

 

알렉산더 자나이우스는 이전의 정책을 버리고 거리낌 없이 자신을 왕 겸 대제사장으로 선언하였습니다. 하스몬 가와 바리새인들 사이의 갈등은 점점 깊어졌으며, 심지어는 그 때문에 내전이 일어나 5만 명의 유대인이 사망하였습니다.

 

자나이우스는 반란을 진압한 후에 이교의 왕들이나 하던 식으로 800명의 반역자를 기둥에 못박아 처형하였습니다. 그들이 죽어 갈 때에 그들이 보는 앞에서 그들의 아내들과 자녀들이 살해되었는데, 그러는 동안 자나이우스는 자신의 첩들과 버젓이 잔치를 벌였습니다.

 

자나이우스는 바리새인들에게 적의를 품고 있기는 했지만, 현실적인 정치가였습니다. 그는 바리새인들이 대중으로부터 점점 더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임종 시에 아내인 살로메 알렉산드라에게 바리새인들에게 권력을 나누어 주라고 하였습니다.

 

자나이우스는 왕국의 후계자로 아들들이 아닌 아내를 선택하였습니다. 살로메는 자신이 능력 있는 통치자임을 입증하였으며, 하스몬 왕조의 통치 기간 가운데 보다 평화로운 시대(기원전 76년-67년)를 이룩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권위 있는 지위를 회복하였으며, 그들의 종교 규정에 반대되는 법들은 폐지되었습니다.

 

살로메가 사망하자, 대제사장으로 일하던 그의 아들 히르카누스 2세와 아리스토불루스 2세가 세력 다툼을 벌였습니다. 그들은 둘 다 선조들이 가졌던 것과 같은 정치적·군사적 통찰력이 부족하였으며, 셀레우코스 왕조가 완전히 붕괴된 후 그 지역에서 로마의 세력이 커져 가던 사태의 심각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기원전 63년에, 그 두 사람은 다마스쿠스에 있던 로마 통치자 폼페이우스에게 자신들의 세력 다툼을 중재해 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바로 그 해에, 폼페이우스는 군대를 이끌고 진격하여 예루살렘을 장악하였습니다.

 

그로 인해 하스몬 왕조의 몰락이 시작되었습니다. 기원전 37년에, 예루살렘은 이두매의 왕인 헤롯 대왕의 손에 넘어갔으며, 로마 원로원은 헤롯 대왕을 “유대의 왕”, “로마인의 협력자이자 친구”로 승인하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하스몬 왕조는 막을 내리고 말았습니다.

 

마카베오 가문은 하나님의 숭배에 대한 열심으로 출발하였지만, 그들의 열심은 압제적인 이기심으로 변질되었습니다. 사람들을 연합시켜 하나님의 율법을 따르게 할 수도 있었던 그 가문의 제사장들은, 나라를 정치적 내분의 구렁텅이에 빠뜨렸습니다.

 

마카베오 가문은 몰락하였지만,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과 다른 분파들이 종교적 지배권을 놓고 벌인 싸움은 당시 헤롯과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된 그 나라의 특징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대중이 메시아인 예수를 배척하게 만들 정도로 여론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태 15:1, 2; 16:1; 요한 11:47, 48; 12:42, 43) 하지만 구약 성경에서는 그 어디에도 이 영향력 있는 두 집단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습니다.

 

 

 

 

 

 

 

 

출처 : 창골산 봉서방
글쓴이 : 봉서방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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