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개신교의 시작
한국 개신교의 역사는 매우 독특하다. 특히 개신교가 전래되고 교회가 설립되는 전체 과정을 살펴보면, 거기에 분명한 하나님의 섭리와 간섭하심이 나타나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한국 개신교의 시작은 선교사에 의해 시작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시작된다. 카톨릭과는 달리 개신교는 처음부터 성경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한국인들은 선교사의 지도가 아니라, 스스로 성경을 읽음으로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믿게 된 이들에 의하여 성경이 번역되었다. 이일에 큰 공헌을 한 사람들이 이응찬, 서상륜, 이수정 등이다. 특히 언더우드 선교사는 이수정이 번역한 마가복음을 들고 입국했다.
선교사들의 사역 또한 무시될 수 없는데, 그들은 전인격적인 사역을 통해 복음전파를 쉽게 했고, 네비우스 선교정책의 실시로 복음적인 기독교 성장에 기여하였다.
한국 개신교가 시작되는 일련의 과정은 유럽과 미국의 동양진출과 같은 시기에 이루어졌다. 한국에 개신교가 전래된 과정을 시기와 지역에 따라 분류해 보면 중국, 만주, 일본 그리고 미국 순이다. 중국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개신교의 선교활동이 시작되었는데, 중국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인 귀츨라프(K.F.A.Gutzlaff 1803-1851)와 윌리암슨(A.Williamson) 등이 한국 선교에 관심을 가지고 여러 가지로 도움을 제공했다. 중국을 통한 개신교의 전래는 주로 만주를 거쳐서 이루어졌다. 특히 로스(J.Ross 1842-1915)와 맥킨타이어(J.Mclntyre 1837-?)는 만주에서 진취적인 서북 지역 청년들과 함께 성경번역 사업을 했다. 한편 일본을 통한 개신교 전래에 있어서 지대한 공헌을 한 사람은 이수정(李樹廷)으로 그는 일본에서 세례를 받고 「현토한한신약성서」(顯討漢韓新約聖書)와 「신약 마가젼 복음셔 언해」를 출간했다. 그가 번역한 마가복음서를 들고 미국의 언더우드 선교사가 입국했다.
1. 개신교의 전래
한국 개신교의 전래 역사를 살펴보면 세계 선교사상 찾아보기 어려운 특징이 발견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선교사 입국 이전에 이미 성경이 한글로 번역되었고, 또한 그 성경을 통해 기독교를 믿는 자들이 자생적으로 존재했다는 것이다. 오래 전에 한국에 표류해 온 화란인 벨트브레(J.J.Weltvree, 朴燕)나 하멜(H.Hamel) 등은 한국에 종교적인 영향을 직접적으로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하멜이 쓴 표류기를 읽은 귀츨라프 선교사는 1832년에 잠시 한국에 머물렀고, 윌리암슨 선교사는 토마스나 로스 등을 격려하여 한국 선교에 힘쓰도록 하였다. 토마스(R.J.Thomas 1840-1866) 선교사는 1866년 27세의 나이로 대동강변에서 순교하면서 한문성경을 전해 주었고, 로스와 맥킨타이어 선교사는 만주에서 이응찬, 서상륜 등과 함께 성경을 번역했다. 이 '로스역 성경'은 서상륜을 비롯한 매서인(賣書人)들을 통해 국내에 유입되었다. 한편 일본에서는 이수정이 성경번역 사업을 하고 있었다.
2. 선교사의 활동
1) 선교사들의 입국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은 준비작업을 통해 한국 내에는 자생적인 신앙인들의 모임이 형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선교사들의 입국으로 한국 교회는 비로소 본격적으로 조직적인 성장을 하게 되었다. 선교사로서 한국에 최초로 입국한 사람은 알렌(H.N.Allen 1858-1932)이었으나 그는 선교사로서보다는 의사로서 활약했다. 그는 감시정변을 계기로 고종의 총애를 받아 왕실과 가까운 관계를 맺고서 활동했다. 1885년에는 장로교의 언더우드(H.L.Underwood 1859-1916)와 감리교의 아펜젤러(H.Appenzeller 1858-1902) 그리고 스크랜톤(Scranton)과 헤론(J.H.Heron) 등이 입국하여 의료와 교육사업 등을 시작했다. 또한 1908년에 이르기까지 여러 나라에서 많은 선교사들이 꾸준히 입국해 들어왔다.
2) 활동
선교사들이 한국에 입국하여 벌인 선교사업은 크게 몇 가지로 나뉘는 데 그것은 의료, 교육, 문화선교 등이다. 의료선교 활동은 알렌과 스크랜톤을 중심으로 수행되었다. 알렌은 광혜원(廣惠院)을 세워 병자들을 치료하고 서양의술을 교육하였다. 스크랜톤은 빈민들의 치료에 관심을 가져 상동에 병원을 세웠고, 하워드(M.Howard) 양은 여성 전용병원인 보구녀관(保救女館)을 세웠다. 교육선교 활동은 특히 감리교 측에서 많은 관심을 가지고 수행했는데 아펜젤러는 배재학당을, 스크랜톤 여사는 이화학당을 세웠다. 한편 언더우드는 구세학당을 엘러(A.Eller)는 정동여학당을 세웠다. 문화선교 활동은 주로 성경번역과 출판 방면에서 수행되었다. 기존의 로스역과 이수정역을 보완하기 위하여 1893년에 번역연합위원회가 만들어져서 여러해 동안의 번역을 통하여 1900년과 1910년에 각각 신약과 구약을 번역했다. 찬송가는 1897년 감리교의 「찬미가」를 시작으로 하여 1928년에 장로교와 감리교가 연합하여 「신정찬송가」가 발행되었고, 다시 1935년에 「시편찬송가」, 「합동찬송가」 등이 각각 발행되었다. 성경과 찬송 외에도 〈죠선 그리스도인 회보〉, 〈그리스도 신문〉 등의 신문이 발간되기 시작했고 잡지로는 〈교회〉, 〈신학지남〉, 〈코리아 미션필드〉 등이 발간되었다.
3. 선교정책
1) 네비우스 방법 이전
개신교는 한국인들에게 생활과 밀접한 종교로 알려졌는데 그것은 천주교가 종교라기보다는 하나의 학문으로 알려진 것에 비하면 매우 대조적이다. 천주교에 비하여 개신교의 선교가 매우 성공적이었던 것은 개신교의 선교정책이 한국의 현실을 염두에 두고 잘 계획되고 실행되었기 때문이다. 네비우스 이전의 개신교 선교정책은 문서화된 것은 없으나, 주로 노방·순회전도·의료·교육선교, 사랑방전도, 문서전도 등이라고 볼 수 있다. 순회전도는 초교파적으로 행해졌고, 의료·교육·사랑방전도는 감리교에서 특히 강조적으로 시행했다. 문서선교에 있어서는 배재학당 내에 설치된 삼문(三文) 출판소(The Trillingual Press)가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2) 네비우스 선교 방법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은 대부분이 20대의 젊은이였으므로 그들은 중국에서 사역하던 네비우스(J.Nevius 1829-1893)를 초청하여 그의 경험과 선교방법에 대해 배우고자 했다. 네비우스가 제시한 선교방법은 자립·자치·자선을 기초로 한 성경중심적인 방법들이었다. 이 방법의 채택, 시행으로 한국 교회는 매우 건전한 교회로 성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특히 장로교의 경우는 지도자의 수준을 높이는 데 실패했다.
4. 교회의 설립
한국 최초의 교회는 순수하게 한국인들을 중심으로 하여 세워진 소래교회(1884년 설립)이다. 그러나 그것은 미조직 교회였고, 조직교회로는 언더우드 선교사가 중심이 된 서울 정동교회(새문안교회의 전신)이다. 당시 교회의 조직을 보면 선교사를 돕는 조사(助事, Helper)와 전도부인들(Bible Women), 각 교회를 치리하는 영수(領袖, Leader)가 있었고 현재에도 있는 집사, 장로, 목사가 있었다.
한국 교회는 하나님의 섭리 아래서 많은 선교사들과 한국인들의 피와 땀에 기초하여 시작되었고 자라왔다. 우리는 우리에게 전해진 신앙의 유산을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에만 매어 있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것에 기초하여 더욱 성숙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만들어 나가기 위해 전력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 아니라 그들을 들어 쓰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뜻을 잘 받들어 아름다운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서도록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1. 이수정의 성경번역 사업
미국 성서공회 루미스 총무는 이수정의 개종에서 한국선교의 가능성을 보았다. 그는 이수정을 찾아가 한국선교의 지름길인 성경번역을 제안하였다. 이수정은 성경이 한민족에게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임을 확신하였고 자신의 번역이 이후 한국으로 들어가는 선교사들에게 준비과정에서 도움이 될 것을 잘 알았기 때문에 흔쾌히 임했다. 1883년 5월 중순에 시작된 이 작업은 먼저 한문 성경에 당시 한국 지식층에서 널리 사용되던 토를 다는 방법으로 착수하였다. 착수한 두 달 만인 6월 21일경 신약 전체를 완성했으나 출판은 11월에 시작되었다. 「신약성서마태전」을 필두로 1883년 11월에 인쇄에 들어가 1884년 8월까지 「신약성서마가전」, 「신약성서로가전」, 「신약성서약한전」, 「신약성서사도행전」 등 5권의 단편 한한 성서가 각 1천부씩 출간되어 나왔다. 신약전서가 현토되었고 로마서까지 조판이 완성되었으나 사도행전까지 간행한 것은 한한성서보다는 한글성서의 필요가 더 절실했기 때문인 듯하다.
2. 삼문출판사(三文出阪社, Trilingual Press)
1889년부터 올링거에 의해 배제학당 안에 인쇄소가 설립되면서 단행본 출판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이 인쇄소는 영문·한문·한글 세 문자의 인쇄시설을 갖추고 있어서 '삼문출판사'란 이름이 붙여졌다. 이 인쇄소는 1899년에 인쇄시설을 확충하고 미이미교회출판소(The Korea Methodist Publishing House)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1906년부터 장로교와 합동으로 연합출판사로 개편할 계획을 세웠으나 북방로교회의 불참으로 성사되지 못했고 1909년 폐쇄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곳에서 인쇄 혹은 발행된 초기 기독교 문서들로 인해 한국 기독교뿐만 아니라 일반 문화 향상에 기여한 바는 크다
1890년대 이후 번역되기 시작한 단편 성경들이 이곳에서 인쇄되었고 정기간행물 〈죠션크리스도인회보〉, 〈그리스도신문〉, 〈The Korea Repository〉, 〈The Korea Field〉, 〈The Korea Methodist〉, 〈신학월보〉, 〈엡윗청년회보〉, 〈성경강론월보〉뿐 아니라 〈독립신문〉, 〈협성회보〉, 〈경성신문〉, 〈매일신문〉 등 일반 신문까지도 인쇄하였다.
3. 선교 연합활동
한국에 전래된 기독교는 다양한 신학과 교리적 배경이 다른 교파형 교회였음에도 파송된 선교사들은 본국 교회선교부의 지휘와 감독을 받으며 서로 협력하고 연합함으로 공존의 길을 모색하였다. 그 결과 나타난 것이 선교사 연합공의회와 선교지역 분할협정이다. 이 같은 사업은 장로교와 감리교에 의해 주도되었다.
1) 한국 복음주의선교회연합공의회(The General Council of Protestant Evangelical Misions in Korea) : 1905년에 장로교회 4개 선교부, 감리교의 2개 선교부가 결성한 협의체이다. 9월 11일 이화여학교 예배실에서 창설된 이 연합공의회는 그 기능이 단순한 선교사 협의 기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된 개신교회'에 대한 강한 의도를 표방하고 나섰다. 헌장 제2조에서 "이 공의회의 목적은 선교 사업에 있어 협력을 기하는 것이 될 것이며 결과적으로는 한국에서 유일한 하나의 복음주의 교회를 조직하는 데 있다"고 명기하였다.
2) 선교지역 분할 : 하나의 나라에 여러 교파 선교회가 진출하여 선교함으로써 야기 될 수 있는 갈등과 마찰을 피하기 위해 선교회간에 지역분할이 추진되었다. 이것이 교계예양(敎界禮讓)으로도 불리는 선교지역 분할협정이다. 이 협정의 근본 목적은 '가장 빈번한 마찰의 요인이 되고 있는 사업의 중첩을 피하고 돈과 시간과 힘의 낭비를 줄이기 위한 것'이었다. 이 협정은 1892년 미감리회와 북장로회 사이에 처음으로 이루어졌는데 1892년 6월 11일 서울에서 미감리회와 북장로회 선교사들이 모여 협의하고 그 이듬해 두 선교회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4. 언더우드의 네비우스 선교방법 정리
네비우스의 강연과 저술을 통해 한국에서 새로운 선교정책을 모색하려는 분위기가 조성되자 언더우드는 4개의 조항으로 네비우스의 선교 방법을 정리하였다.
① 각자가 '처음 부르심을 받았을 때의 형편에 거하게'하며 각 개인이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이 되어 자기 이웃들 속에 살면서 스스로 생업을 꾸려 나가면서 그리스도인으로 살도록 가르친다.
② 교회의 방법이나 조직을 토착 교회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에서 발전시킨다.
③ 교회 스스로가 가능한 한 인력과 재정을 공급하게 하여 이웃 곳에서 복음사역을 하게 하되 좀더 나은 자질이 발견된 사람은 별도로 둔다.
④ 본토인들로 자기네 교회당 건물을 마련하게 하되 그 건물은 토착적인 것이어야 하고 지역교회가 능히 꾸밀 수 있는 그런 양식으로 지어야 한다.
특이할 만한 것은 본토인들이 기독교인이 되었을 때에 본래의 작업이나 환경을 그대로 고수하도록 유도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복음사역도 가급적 출신지에서 하도록 유도하였다.
한국의 개신교는 전래된 지 100여 년 만에 전국민의 20%를 넘는 교인을 확보함으로 세계 기독교사에 하나의 기적을 창출했다.
또한 한국의 기독교는 선교사가 들어오기 전에 성령을 통하여 이미 교인들이 생겨났고, 그들의 요청에 의하여 선교사가 들어온 매우 특이한 경우에 속한다.
최초로 한국에 들어온 선교사는 네덜란드인 귀출라프 선교사이다. 그는 약 한 달란 머물면서 성경을 나누어 주었다. 그 후 1865년 영국의 토마스 선교사가 입국했는데 그는 순교를 당한 한국 최초의 선교사가 되었다. 한편 만주에서는 로스, 맥킨타이어가 한국인을 전도했다.
1884년 알렌 부부, 1885년 언더우드, 아펜젤러가 한국에 입국하면서 본격적인 선교활동이 시작되었다. 선교에 큰 역할을 한 것이 번역성경인데 로스의 번역성경과 이수정에 의한 번역된 성경이 그것이다.
개신교가 전래되던 당시의 한국 종교 상황에 대하여, 많은 외국인들은 한국인들이 아무런 종교도 갖고 있지 않으며 종교에 대한 관심도 없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의 불교는 너무 신부주의로 흘렀고, 유교는 반대로 너무 신비적인 요소를 제외해 버림으로 한국인들에게 만족을 주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대하여 박영효(朴泳孝)는 스크랜톤(W.B.Scranton) 목사에게 "우리의 재래 종교는 지금 기운이 진하였다. 이 백성이 기독교로 돌아오게 할 수 있는 길은 환히 열려 있다"고 했던 것이다. 이미 1627년 화란인 벨트브레(John J. Weltvree)가 표류해 와서 박연(朴燕)으로 개명하고 귀화했고, 1653년에는 하멜(Hendrik Hamel)이 표류했으나 이들은 한국에 직접적인 종교적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1. 전래 과정
1) 선교사 입국 이전
최초로 한국 땅에 발을 디딘 선교사는 화란 교회의 선교사인 귀츨라프(Karl F.A.Gtzlaff 1803-1851)이다. 그는 북부 독일의 폼머(Pommer) 출신으로 1826년에 화란 교회의 파송을 받았는데, 어학 능력이 뛰어난 사이암어와 일본어로 신약을 번역하기도 했다. 그는 1832년에 약 한 달간 장산곶 부근과 군산 만, 고금도 등지를 방문하여, 한문 성경을 나누어 주고, 주기도문을 번역했다. 윌리암슨(Alexander Williamson)은 1855년에는 런던 선교회에서, 1863년에는 다시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에서 파송을 받았다. 그는 중국과 한국 선교에 많은 공적을 남겼고, 특히 '한국 선교의 대부'로 불린다. 그는 토마스 선교사와 로스, 그리고 맥킨타이어 선교사를 격려하여 한국 선교에 힘쓰게 했다. 토마스(Robert J.Thomas 1840-1866) 선교사는 웨일즈 충신으로 런던 대학의 뉴칼리지(New College)를 졸업하고 중국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그러나 그의 아내가 사망하자 사표를 내고 청국의 해상 세관에서 통역으로 일했다. 그는 1865년에 한국의 서해안인 자라리(紫羅理)에 상륙하여 두 달 반 동안 머물면서 한국어를 배우고 성경을 나누어 주었다. 그는 1866년 7월 미국 상선 셔먼호(General Sherman)에 편승했다가 한국인들과의 충돌로 순교했다. 그는 그를 처형하는 군인에게 한문성경을 전해 주고 죽었는데, 이때 그의 나이는 27세였다. 로스(J.Ross 1842-1915)와 맥킨타이어(J.McIntyre 1837-?)는 처남, 매부지간으로 에딘버러 연합장로회 신학대학을 각각 졸업하고 중국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이들은 한국 선교에 관심을 가지고 만주에서 한국인들을 전도했다. 로스는 이응찬을 어학 선생으로 모심으로 김진기, 백홍준, 이성하 등과 접촉하게 되었고, 1876년에 5명의 한국인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1882년에는 누가와 요한복음을 번역했고, 1887년에는 신약 전체를 번역했는데 이 성경은 서상륜을 비롯한 매서인(賣書人=勸書人)을 통해 각지로 퍼져나갔다. 한편 이수정(李樹廷)은 일본에서 기독교에 입교하여 신약전서를 번역하기도 했다.
2) 선교사 입국 이후
1884년에는 알렌(Horace N.Allen 1858-1932) 부부가 입국했다. 이들은 선교사가 아니라 의사로 입국하여 의료선교 활동을 했다. 동년에 서상륜 형제는 황해도 솔내에서 최초의 교회를 설립했다. 1885년에는 언더우드(H.Underwood 1859-1916)와 아펜젤러(H.Appenzeller 1858-1902), 그리고 스크랜톤(Scranton), 헤론(J.H.Heron) 등이 입국하여 본격적인 선교 활동을 시작한다. 이들의 활동에 대해서는 다음 '연구'에서 구체적으로 다루도록 하겠다.
2. 성경번역
1) 로스역
개신교의 전래 과정에 있어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성경 번역에 대한 것이다. 선교사들이 입국하기 이전에 이미 한글로 성경이 번역되었고, 한국에 입국하는 선교사들이 이미 번역된 성경을 들고 들어온 세계 선교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다. 로스(J.Ross)는 만주의 통화연 고려문에서 서상륜과 이응찬을 만나 한글을 배우고 성경의 교리를 가르치면서 1875년부터 성경번역에 착수했다. 그리하여 1882년에는 「예수성교 누가복음젼셔」와 「예수셩교 요안내복음젼셔」를 발간했고 1883년에는 「예수셩교젼셔 말코복음」과 「뎨자행적」(사도행전)을, 그리고 1884년에는 「예수셩교젼셔 맛대복음」을 발간했다. 1887년에는 최종적으로 「예수셩교젼셔」, 즉 신약전서를 번역, 발간했다. 이 성경은 서상륜을 비롯한 많은 매서인들을 통해 시골에까지 전파되었다. 특히 황해도 솔내에는 58세대 중 50세대가 입교하는 놀라운 결과를 가져왔다.
2) 이수정역
이수정은 임오군란 때 민비를 구출한 공으로 수신사(修信使)인 박영효(朴泳孝)가 이끄는 사절단의 비공식 수행원으로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는 거기서 농학자인 쯔다센(津田仙)의 전도로 1883년의 동경의 노월정교회에서 야스가와(安川亭)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는 일본 주재 선교사인 녹스(G.W.Knox), 멕레이(R.Mclay)와 교제하면서 성경을 목사의 복음서 한글번역 요청을 받아 성경을 번역하기 시작하여 1883년에 「현토한한신약성서」(顯討漢韓新約聖書)를 완성했다. 이것은 한문성경에 한글로 토를 달은 형태의 것이다. 그는 1884년에는 순 우리말로 된 「신약마가젼복음셔언해」를 출간했다. 약 두 달간 일본에 머무르던 언더우드 선교사는 이수정에게 한글을 배우고 그가 번역한 마가복음서를 가지고 한국에 입국했다. 한편 이수정은 1886년 5월에 귀국하였다가 비밀리에 처형되었다.
한국 개신교의 전래 역사를 살펴보면 천주교의 전래 방식과 매우 다른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 특징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한국선교는 한국인들의 자발적인 요청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② 선교사의 입국보다 성경의 번역과 유입이 먼저 이루어졌다. ③ 의료선교와 교육선교 등 한국의 현실을 잘 파악한 선교 방법이 시행되어 점진적으로 거부감없이 복음이 전파되었다. ④ 한국 선교는 하나님의 섭리 아래서 동시다발적으로 북으로는 만주, 남으로는 일본을 통하여 시행되었다.
이와 같은 한국 개신교 선교는 결국 성공적인 선교사역의 열매를 맺게 했다. 특히 성경을 중심으로 한 성경을 중심으로 한 신앙 형태는 매우 강한 지주로서의 역할을 하여 지금까지도 한국 교회의 중요한 특성으로 나타나고 있다. 성경을 중심으로 한 신앙은 오늘에 있어서도 새롭게 강조되고 실천되어야 할 중요한 유산이다. 오늘의 우리 삶 속에서도 능력 있는 하나님의 말씀의 역사가 나타나도록 힘써야 하겠다.
1. 선교사들의 입국과 선교정책
1) 선교사의 입국
① 1884년 알렌 의료선교사 (미북장로교회) ② 1885년 언더우드(미북장로교회), 아펜젤러(미감리교회) ③ 1889년 데이비스 남매(호주장로교회), 게일(캐나다 독립전도단), 펜윅(캐나다 침례교회) ④ 1890년 코르프 신부(영국 성공회) ⑤ 1892년 이눌서, 전위렴 ⑥ 1894년 매켄지(캐나다 장로회) ⑦ 1896년 리드(미남감리교회) ⑧ 1900년 헬라 정교회 ⑨ 1904년 안식교 ⑩ 1907년 동양 선교회(성결교) ⑪ 1908년 구세군
2) 선교정책
① 의료사업-알렌, 스크랜톤 등 ② 교육사업-배재학당, 이화학당, 구세학당, 정신학교, 연희전문학교 ③ 문화사업-출판사업, 찬송가 편찬, 주간신문, 잡지, 성경 보급 등 ④ 네비우스 선교방법-자립, 자치, 자전
2. 하멜(Hendrik Hamel ?-1692)
네덜란드의 선원으로 1651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 선박의 포수로 바타비아(자카르타)에 건너갔다가 서기로 승진, 1653년 상선 스페르웨르로 대만을 거쳐 일본 나가사키로 가는 도중 일행 38명과 제주도에 표착하였다. 그는 제주목사 이원진의 심문을 받고 이듬해 서울로 압송되어 훈련도감에 편입되었으며, 1657년 강진의 전라 병영, 1663년 여수의 전라좌수영에 배치되어 잡역에 종사하다가 1966년 7명의 동료와 함께 탈출하여 일본을 거쳐 1968년 귀국하였다. 그 해에 「하멜표류기」로 알려진 기행문을 발표하였는데, 이는 그의 억류생활 14년간의 기록으로서 한국지리, 풍속, 정치, 군사, 교육, 교역 등을 유럽에 소개한 최초의 문헌이다.
3. 맥킨타이어(Mclntyre 1837-?)
스코틀랜드 연합장로교회의 만주 선교사이며 로스역 한글 성경의 공헌자인 그는 한자명이 마륵태(馬勒泰)였다. 로스(J.Ross) 목사와 함께 1872년 봉천에서 전도하기 시작한 맥킨타이어는 만주의 고려문에서 이응찬 등을 만나 이들로부터 한국말을 배우면서 한국인에 대한 선교의 대망을 품게 되었다. 그는 1879년에 「한국 언어론」이라는 일종의 어휘집을 간행하였고 성경번역을 위한 준비단계로 각고의 연구 끝에 「한국의 역사, 생태, 관습」이라는 404편의 방대한 저서를 런던에서 간행하였다. 성경의 한국말 번역은 1875년부터 시작하여 1878년 로스와 이응찬 등의 공역으로 일단 완료되어 있었다. 그러나 로스가 안식년으로 귀국함에 따라 맥킨타이어가 이를 맡아 한국인 번역자들과 함께 이 역본 초고를 구구절절 재수정하여 그 교정을 끝냈다. 그리고 1882년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와 영국 성서교회의 도움을 받아서 심양의 문광서원 발행으로 「예수 셩교누가복음 젼셔」와 「예수 셩교요안복음 젼셔」를 3천부 간행하였다. 이것은 한국말로 번역된 최초의 성경이었고 언더우드가 한국에 입국하기 3년 전의 일이었다. 성경 번역 과정은 맥킨타이어가 먼저 한국인들과 함께 한문성경을 보고 번역한 것을, 다시 희랍어 원문과 대조하면서 진행하고 일단 끝난 초고는 4차에 걸쳐 일일이 재수정하는 절차를 밟았다. 그 인쇄는 스코틀랜드와 영국의 성서공회가 후원한 재정적 도움으로 이루어졌는데 1881년 인쇄기를 상해에서 구입하여 봉천에 설치하였고, 중국인 인쇄공과 김청송이라는 한국인 식자공의 노력에 의하여 그 최초의 한국말 성경이 간행되게 되었다. 그런데 이 성경은 로스의 발상과 시작이란 의미에서 흔히 '로스역'이라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맥킨타이어의 계속적인 끈기와 정성이 없었더라면 이만큼 빨리 완벽한 형태로 간행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4. 셔먼호 사건
1866년(고종 3년) 7월에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평양에 이르러 통상을 요구하다가 거절당함으로써 일어난 사건이다. 당시 천진에 체류중인 미국인 프레스턴 소유의 상선 셔먼호는 비단, 유리그릇, 천리경, 자명종 등의 상품을 적재하고 프레스턴을 비롯하여 윌슨과 덴마크인 선장 페이지, 영국인 호가스 및 토머스를 선교사 통역으로 삼아 7월 11일에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평양 경내에 들어왔다. 평안도 관찰사 박규수는 사람을 보내어 방문목적을 물었고 상거래에 대한 답을 들었으나 그 당시 국법으로 금지되어 있어 거절하며 출국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그 제의를 거절하고 제지하던 중군 이현익을 가두는 등 평양성의 관민들을 격분시켰다. 또한 강도, 약탈, 총포격 등을 자행하여, 이로 인해 주민 중에서 사망 7명, 부상 5명이 생기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이에 박규수는 화공과 포격으로 셔먼호를 불태워 격침시켰다. 그 결과 토마스 선교사를 포함한 23명 전원이 사망했다.
초기 한국에 전래된 카톨릭과 개신교의 공통점은 그 자생적 성향에 있다. 최초로 한국에 입국한 개신교 선교사의 손에는 이미 한국말로 번역된 성경책이 들어 있었다. 선교사들은 그들의 열정과 더불어 한국 민족의 종교적 감수성 때문에 매우 효과적인 선교활동을 감당할 수 있었다.
그들은 당시의 어려운 정세 속에서 선교활동을 감당해야 했기 때문에 주로 정부의 고관들과 접촉하였으며, 교육과 의료 등 여러 방면에 걸쳐 봉사함으로써 기독교의 인상을 매우 좋게 인식시켰다. 이들의 노력으로 한국에서 신식 교육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초기 선교사들로부터 부정적인 면도 간과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왜냐하면 이들이 인식시킨 기독교 전통 가운데에는 극복하지 못할 분파주의가 들어 있었다. 요컨대 처음부터 상류층과의 긴밀한 관계 속에서 성장한 개신교는 오랫동안 사회 저변의 제반 문제들에 대한 심각성을 느끼지 못하게 된 것이다.
한국에 개신교가 전래되는 데 있어서 선교사들의 역할은 그렇게 핵심적인 것은 아니었다. 한국의 개신교는 어느 정도 자생적(自生的)인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알렌(H.N.Allen)으로부터 시작된 선교사들의 정식 입국은 이후의 한국 개신교의 성향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20대의 젊은 나이로 그들의 왕성한 기력과 열심을 한국 선교를 위해 최대한 발휘했다. 이것은 선교사들 사이에서 장점 또는 단점으로도 작용했는데 이들이 젊었기 때문에 교파를 초월한 연합사업 등이 가능했던 반면 중재할 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 없어서 선교사들간의 갈등이 지속되고 더욱 심화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볼 때 이들은 자신들이 처해 있는 시대에서 최선을 다해 일한 하나님의 성실한 일꾼들이었음을 인정해야 한다.
1. 선교사들의 입국
선교사로서 최초로 한국에 정식 입국한 사람은 알렌(Horace N.Allen, 安連, 1858-1932)이었다. 그는 미국 오하이오 주 델라워(Delaware) 출신으로 웨슬리안 대학과 마이애미 의과 대학을 나왔다. 1883년에 중국 선교사로 상해에 파견되었다가 한국 선교사로 재임명받았다. 그는 의료선교사로 입국했는데 계속해서 의사로서 활동했다. 1884년의 갑신정변(甲申政變)시 보수파의 중추인 민영익(閔泳翊)의 부상을 치료해 준 것을 계기로 고종과 민비의 총애를 받아 왕실부시의관(王室附侍醫官)으로 임명되었고, 1885년에는 미국 북장로교의 언더우드와 미국 감리교의 아펜젤러가 입국했다. 언더우드(Horace L.Underwood 1859-1916)는 영국 런던 출신으로 13세에 미국으로 이주하여 귀화했다. 뉴욕 대학과 화란 개혁교회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1884년에 선교사로 임명받아 1885년에 일본에 도착했다. 그곳에 2개월간 체류하면서 이수정을 만나 한국어를 배우고 그가 번역한 마가복음서를 가지고 입국했다. 그는 독 제중원(濟衆院, 광혜원의 후신)에서 물리와 화학을 가르쳤다. 아펜젤러(Horace Appenzeller 1858-1902)는 프랭클린-마샬 대학(Franklin-Marshall College)과 드류(Drew) 신학교를 졸업했다. 원래 장로교인으로 자랐으나 1879년에 감리교로 전향했다. 언더우드와 함께 제물포에 상륙했다가 상황이 어수선하고 미국 공사인 폴크(Foulk)의 만류로 일본으로 돌아갔다가 5월 1일에 스크랜톤(Screnton)과 함께 다시 입국했다. 그는 배재학당을 설립하고 순회목사로 사역했으며 성경번역에 힘쓰기도 하였다. 같은 해 6월에는 의과 대학 교수 출신인 헤론(John H.Heron)이 입국했다. 1889년에는 호주 장로 교회의 데이비스 남매(J.H.Davis, Miss M.T.Davis) 가 입국했고, 캐나다 독립전도단에서 파송한 게일(J.S.Gale), 캐나다 침례교회 펜위크(Malcom Fenwick) 등이 입국했다. 데이비스는 6개월 후 천연두로 사망했는데, 그의 사망은 호주 장로교회의 한국 선교에 대한 관심을 더욱 불러일으켰다. 1890년에는 영국 성공회의 코르프(C.J.Corfe) 신부가 입국하여 91년 9월에 최초의 성공회 성당을 제물포에 세웠다. 1892년에는 레이놀즈(W.D.Reynolds), 경킨(W.M.Junkin), 테이트(L.B.Tate) 남매 등이 입국했고, 1894년에는 캐나다 장로교회의 맥켄지(W.J.Mckenzie 1861-1895)가 입국했다. 맥켄지는 소래 교회에서 한국인과 같이 생활을 하다가 병사했는데, 캐나다 선교회는 그의 후임으로 푸트(W.Foote), 맥레이(D.McRae), 그리어슨(R.Grierson) 등을 파송했다. 그외에 헬라 정교회는 1900년, 안식교는 1904년, 성결교는 1907년 그리고 구세군은 1908년에 한국에 들어왔다.
2. 활동
1) 의료선교 활동
의료선교 활동은 알렌과 스크랜톤을 중심으로 하여 수행되었다. 알렌은 1885년에 광혜원(廣惠院)을 세웠는데, 그것은 곧 제중원(濟衆院)으로 바뀌었다가 후에 세브란스 병원이 되었다. 스크랜톤은 버림받은 민중을 치료하기 위하여 1894년에 빈민 지역인 상동으로 병원을 옮겼고, 하워드(M.Howard)는 1887년에 여성 전용병원인 '보구녀관'(保救女館)을 세웠다. 1913년까지 선교사들이 세운 의료기관은 모두 14개였다.
2) 교육선교 활동
아펜젤러는 1886년에 고종의 인가로 배재학당을 세웠는데, 처음 2명으로 시작했으나 5개월 만에 32명이 되었다. 스크랜톤 선교사의 어머니인 스크랜톤 부인(M.F.Scranton)은 1886년 5월에 '여자학당과 부녀원'으로 시작한 이화학당을 개교했다. 언더우드는 고아원 형태로 시작하여 '언더우드학당, 예수교학당, 민로아학당, 구세학당, 경신학당' 등으로 불리며 후에 경신학교가 된 구세학당을 시작했다. 그외에도 엘러(A.J.Eller)가 1887년에 정신학교의 전신인 정동여학당을 세웠고, 1910년까지 총 37개 학교가 개신교에 의해서 세워졌다.
3) 문화선교 활동
문화선교 활동으로는 성경번역 및 보급, 찬송가 편찬, 신문·잡지의 출판 등이 있다. 1887년에는 성서번역위원회, 1893년에는 번역연합위원회가 만들어져서 1895년에 마태, 마가, 요한복음과 사도행전이 시험 번역되었다. 1900년에는 신약, 1910년에는 구약이 번역되었고(구역, 舊譯), 1937년에 개정되었다(개역, 改譯), 찬송가는 1897년 감리교의 「찬미가」를 시작으로 미국 북장로교의 「찬송시」, 1900년 침례교의 「복음찬미가」, 성결교의 「부흥가」, 1922년 「구세군가」, 1928년 장로교 감리교가 연합하여 만든 「신정찬송가」, 1935년 「시편찬송가」, 「합동찬송가」 등이 발간되었다. 신문·잡지로는 1897년 〈죠선그리스도인 회보〉, 〈그리스도 신문〉, 1910년 〈예수교 회보〉, 1911년 〈그리스도 회보〉, 1915년 〈기독신보〉(基督申報), 1921년 〈구세공보〉, 1946년 〈기독교공보〉, 1889년 〈교회〉 장비, 1926년 〈야회생활〉, 1933년 〈아이동무〉, 1938년 〈신학지남〉, 1900년 〈신학보〉, 1901년 〈코리아 필드〉, 〈코리아 메도디스트〉, 1905년 〈코리아 미션필드〉등이 발간되었다.
초기 선교사들의 입국은 이상하게도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다. 그들의 사역 또한 매우 협력적이고 연합적이었다. 그들은 '연합공의회'와 '한국복음주의 선교연합 공의회'를 결성하여 많은 부분에 있어서 함께 활동했다. 이렇게 연합적인 활동이 가능했던 것은 이들 대부분이 스코틀랜드 '언약도들'(the Covenanters)의 후손으로서 성경의 권위를 굳게 신앙하는 등 공통의 신앙 체계를 가졌기 때문이었다. 이들 선교사들의 헌신과 연합은 오늘날 교파간 그리고 각 교파 내의 분열된 모습에 경종을 울려 준다. 이제 우리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형제와 연합하는 일을 실천해야 한다. 어떤 기구적이고 제도적인 젓보다 사랑하는 마음과 그것의 작은 실천이 요청된다.
1. 선교사 입국 전의 상황
1) 귀츨라프의 내한
1832년 7월 17일 개신교 선교사로서는 최초로 서해안에 도착하여 전도문서를 나누어 주었다.
2) 윌리암슨의 한국선교 지원
토마스 목사를 알선하여 한국선교에 나서도록 하였으며 만주를 통해 한국 선교를 시도하였다. 또한 1883년 중국내지 선교화 소속의 의료 선교사 다우드회 소속의 의료 선교사 다우드 웨이트(Arthur W.Douthwaite)를 요청하여 한국을 방문하게 한다.
3) 제너럴 셔먼호 사건
제너럴 셔먼호 사건으로 한국 선교를 위해 그 배에 탔던 선교사 토마스와 그 일행은 죽임을 당하였다.
2. 이수정과 그의 신앙 활동
임오군란 때 민비를 구출한 공으로 인해 1882년 9월 수신사 박영효의 비공식 수행원으로 일본에 가게 된 이수정은 그곳에서 츠다센을 만나게 되었고 1883년 4월 29일 노월정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는 자신이 맛보는 기쁨과 복음의 비밀을 당시 김옥균의 인솔로 일본에 가 있던 30여 명의 유학생들에게 전도함으로 손봉구, 이경필을 비롯한 여러 명의 학생이 세계를 받았다.
또한 성경이 한민족에게 철도나 전신, 기선보다 더 필요한 것임을 확신하였기에 루미스의 성경 번역 제안을 받아들여 「신약성서마태전」을 필두로 「신약성서나가전」, 「신약성서약한전」, 「신약성서사도행전」 등이 출간되었다.
3. 맥클레이의 한국 방문
처음에 중국 선교사로 활약하다가 일본으로 옮겨간 맥클레이는 김옥균을 만나 1884년 7월 3일 한국을 방문하게 되었다. 국왕으로부터 한국에서 교육과 의료를 통한 선교사업을 할 수 있도록 허가를 받은 맥클레이는 며칠 동안 서울에 머물며 선교사업을 위한 정보를 수집하고 대지를 물색하였다. 맥클레이의 성공적인 한국방문은 미감리회의 해외 선교에 대한 새로운 이정표를 세우게 했다. 그 이듬해 아펜젤러가 교육사업을 통한 선교활동을 위하여, 스크랜톤이 의료 선교사업을 목표로 각각 한국에 들어올 수 있게 되었던 것은 맥클레이의 선구적 활동이 있었기 때문이다.
4. 초기의 의료선교
① 1884년 10월에 미국 공사관 소속 의사 자격으로 들어온 알렌은 갑신정변 때 중상을 입은 민영익을 치료함으로 고종과 민비 및 정부측 인사들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그는 갑신정변 때 처형당한 홍영식의 집을 하사받아 1885년 4월에 광혜원(후에 제중원이라 개칭됨)이란 우리 나라에서는 처음보는 서양의 근대식 병원을 세웠다. ② 1885년 9월 10일에 정동에서 감리교의 스크렌톤의 민간의료 기관으로 진료소를 시작하였다. 1886년에 정식으로 병원을 설립했는데 이것이 시병원이다. 스크랜톤은 버림받은 환자치료에 정성을 다했다. 1894년 빈민지역인 상동으로 병원을 옮겼다. ③ 1887년 하워드에 의해 여성전용병원이 시작되었다. 처음에 시병원에서 시작했다가 1888년 건물을 마련하고 '보구녀관'이란 이름을 붙였다.
5. 초기의 교육선교
① 1885년 미국공사 폴크를 통해 학교 설립허가를 받은 아펜젤러는 1886년 6월 2명의 학생으로 정식학교를 시작한다. 이것이 배재학당의 시작이다. 이 학교는 문을 열자마가 5개월만에 32명에 이른다. ② 언더우드는 고아원 형태로 교육사업을 시작했다. 그는 극빈자나 고아를 위해 정동에서 학생 1명으로 1886년 5월 11일에 정식으로 문을 열었다. 고아원 학교인 이학당은 1905년 경신학당으로 정착하였다. ③ 1886년 5월 31일에 스크랜톤 부인에 의해 이화여학당과 1887년 6월 엘러즈에 의해 정동여학당이 설립되었다. ④ 서울을 제외한 지방에도 선교부 혹은 지역 교민들과 합동으로 설립한 기독교 학교들이 늘어났다.
기독교 학교에서는 초기 교과목에 한문, 역사, 지리, 수학, 과학 등 일반 과목에 많은 비중을 두었고 예외없이 성경 과목을 포함시켜 기독교 복음전도의 기회로 삼고자 했다. 복음전도의 도구로는 의료선교보다 교육선교가 보다 효율적이었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학교는 '한국을 복음화시키는' 도구였다. 이점에서 선교사들의 의도는 분명했다. 그러나 학교를 찾는 학생들은 이 점이 갈등의 용인이 되기도 했다. 이런 종교적 갈등은 민족의 종교가 되기 위해 극복해야 할 관문이기도 했다. 민중계층은 병원이나 학교를 통한 선교활동을 은혜의 행위로 받아 들였고 그만큼 기독교에 대해 개방적인 분위기였으나 식자층과 지배계층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그러나 선교사들이 펼치는 의료·교육사업으로 인해 종래 기독교에 대한 그릇된 선입관이 많이 해소되었고 기독교에 대한 배타적인 분위기도 많이 사라지게 되었다.
천주교는 선교 초기부터 동학(천도교), 북학(유교, 도교 이후의 실사구시의 실학), 남학(인도의 불교)가 나란히 서학으로 일컬어진 양반의 관심 대상이었다. 반면에 개신교는 하부계층으로 스며들어 전파 속도가 빠른 새로운 종교로 인식되었다. 개신교가 직접적인 복음전파에 앞서 왕실의 공식허가를 얻어 교육기관과 의료기관을 창설하여 조선사회에 봉사하기 시작한 것은 논쟁적 학문으로서의 천주교 선교방침에 비해 우월했다고 평가된다. 기관선교 이외에 인쇄시설과 잡지 도서 신문을 통한 문서선교가 뒤따랐으며 '전도부인'으로 하여금 문서를 지참하고 노방전도, 사랑방전도를 하였으므로 귀로 듣고 눈으로 읽으며 마음에 새기는 여유를 피전도자에게 줄 수 있었다. 나아가 교사와 교역자 양성, 성경번역과 교재개발, 선교사들 간의 교계예양(사역지역 조정) 등으로 현실적 선교정책을 펴나감으로 개신교 선교는 성공할 수 있었다.
한국의 개신교 선교는 천주교에 비하여 매우 성공적이었다. 그러한 차이는 천주교와 개신교가 어떤 방법으로 한국인들에게 전해졌으며, 또 그것을 한국인들이 어떠한 것으로 받아들였는가 하는 것에서 생겨난다. 당시 천주교와 개신교를 욕하는 사람들은 그것들을 각각 요학(妖學), 사학(邪學), 패륜지학(悖倫之學)으로 그리고 '예수쟁이, 예수꾼' 등으로 불렀다. 이것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천주교가 어떤 종교로서라기보다는 하나의 '학'(學)으로 한국인들의 인상에 새겨졌다고 하는 것이다. 이에 비하여 개신교는 전염성이 강하고 하층민들이 주로 믿는 종교로 인식되어졌다. 결과적으로 개신교는 천주교에 비해 수월하게 복음 전파를 할 수 있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복음의 핵심은 그대로 간직한 채 한국의 상황에 잘 적응한 선교 정책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1. 네비우스 이전의 정책
1) 네비우스 이전
초기 개신교의 선교 방법은 주로 노방전도, 사랑방전도, 순회전도, 교육선교, 의료선교 그리고 문서선교 등이라고 할 수 있다. 노방전도와 순회전도는 웨슬리(J.Wesley 1703-1791) 시대와 그 이후의 감리교를 중심으로 한 전도 방법이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교파를 초월하여 이 방법을 사용하였다. 사랑방전도는 주로 전도부인을 통하여 시행되었는데 그 효과는 매우 컸다. 교육선교를 제일 강조한 교파는 감리교이다. 아펜젤러가 한국에 입국하여 처음 행한 것은 고종의 윤허를 받아 배재학당을 세운 일이다. 감리교 이에도 선교사들은 이화학당, 구세학당, 정신학교, 연희전문학교 등 많은 교육기관을 설립했다. 의료선교의 효시는 알렌이다. 알렌과 스크랜톤, 하워드 등은 의료 활동을 통하여 한국인들이 자연스럽게 복음을 접할 수 있게 하였다. 문서선교에 있어서는 특히 배재학당 내에 일부의 인쇄시설을 하여 '삼문(三文) 출판소'(The Trillingual Press)를 설립해서 잡지, 신문, 교재 등을 출판했다. 여기서는 「천로역정」, 「한국유기」(韓國留記), 〈독립신문〉 등을 출간했다.
2) 감리교의 선교 정책
네비우스 선교 정책은 한국 개신교의 일반적인 선교 정책이기도 하면서, 특별히 장로교의 선교 정책이다. 그러므로 네비우스 선교 정책을 살펴보기 전에 장로교와 더불어 대표적 교단이었던 감리교의 선교 정책을 살펴본다.
감리교의 선교 정책에 대해서는 도식화된 문서상의 규정은 없다. 물론 그 내용이 간접적으로 네비우스 방법에 접근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감리교 선교 정책의 특징은 다음과 같은 3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① 순회전도, ② 교육에 대한 강조, ③ 부녀사업에 대한 강조, 순회전도는 원래 감리교식의 전도 방법으로 아펜젤러, 존tm, 리이드 등은 그들의 기동성을 발휘하여 전국 각지를 다니면서 전도했다. 또한 감리교는 교육 일반에 주력하여 복음전도의 한 수단으로 삼았다. 감리교는 부녀사업에 있어서 특별히 공을 세웠는데, 전도부인들(Bible Women)을 통한 무당종교의 진압, 여성을 위한 병원인 '보구녀관'(保救女館), 쉐어우드(Rosetta Sherwood)의 여성을 위한 '의료강습반'(Medical Training Class), 에드먼즈(M.J.Edmunds)의 간호원 양성소 등이 그것이다.
2. 네비우스 선교 방법
1) 발단
대부분의 개신교 선교사들은 20대의 젊은이들로 선교 경험이 없어서 어려움을 당하고 있었다. 이들이 한국에 파송될 때의 나이를 살펴보면 1885년에 입국한 스크랜톤과 헤론은 29세, 아펜젤러가 27세, 언더우드가 26세였고, 1888년에 입국한 게일은 25세였다. 1890년에 입국한 마펫은 26세였다. 또한 선교사 중 최고참으로 행세하던 알렌도 1884년 입국시 26세였다. 그러므로 이들은 산동성에서 사역하고 있던 네비우스를 초청하여 경험담을 듣고, 선교 정책에 대하여 배우고자 했다. 네비우스(John Nevius 1829-1893)는 뉴욕 출신으로 프린스턴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로 산동성에서 사역하고 있었다. 마침내 네비우스는 1890년 6월에 한국을 방문했다.
2) 방법
네비우스가 제시한 선교 방법은 9가지 정도로 분류해 볼 수 있다. 그것은 먼저 ① 자립 ② 자치 ③ 자선의 3가지를 그 기본으로 한다. 자립(自立, self-support)이란 교회당 건축, 교회를 조직하여 전도인의 봉급을 지급하는 일들을 교인들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원리이다. 자치(自治, self-government)란 교인들이 선택한 무보수의 지도자 아래서 교회를 경영하려는 자립정치의 원리이다. 그리고 자전(自傳, self-propagation)이란 신자 각인이 다른 사람의 성경교사가 되어야 한다는 원리이다. 이러한 3가지 원리에 입각하여 더욱 구체적으로 제시된 선교 방법은 다음과 같다. ④ 노동자 및 하층민들과 여자, 어린이를 주된 대상으로 하는 순회전도, ⑤ 의료 사업을 통한 전도, ⑥ 학교교육을 통한 교사와 교역자의 양성, ⑦ 성경번역과 체계적인 성경연구를 통한 전도와 교육, ⑧ 성경에 입각한 철저한 훈련과 치리의 시행, ⑨ 선교사들간의 협력과 일치의 노력. 특히 이중에서 각 교파 선교사들간의 협력사업은 소위 '교계예양'(敎界禮讓, Comity Arrangements)을 통한 지역의 분할로 나타났다. 그리하여 미국 북장로교는 평안도·황해도·경상북도를, 미국 남장로교는 전라도, 미국 북감리교는 충정도, 미국 남감리교는 강원도, 캐나다 장로교는 함경도, 그리고 호주 장로교는 경상남도 지역을 담당하게 되었다.
3. 네비우스 방법의 실행 결과
네비우스 선교 방법은 한국 교회의 특성에 매우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긍정적인 부분만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제 그것의 공(功)과 과(過)를 살펴보자, 네비우스 방법이 한국 교회에 끼친 긍정적인 결과를 다음과 같다. 첫째, 한국 교회는 네비우스 방법의 원리대로 자립·자치·자전하는 교회로 성장할 수 있었다. 둘째, 성경 중심적인 선교로 인해 성경 중심적인 교회로 성장하게 되었다. 셋째, 한글성경의 번역으로 한글 보급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 그러나 네비우스 방법은 다음과 같은 문제점을 안고 있기도 했다. 선교의 주 대상을 하층민과 여자, 어린이들에 둠으로 교인들의 질(質)적 수준이 저하되었으며, 장로교는 타교파에 비하여 교역자 양성책이 미비하여 수준 높은 교역자들이 부족한 결과를 가져왔다.
침례교의 펜위크(Malcom Fenwick) 선교사는 그의 사역 결과 "한국 기독교는 한국인이 전담하여 일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네비우스 방법은 펜위크의 사상과 거의 일치하는 성향을 띠지만, 한국 교회를 이끌어 나갈 한국인 지도자의 양성에 소홀했다. 그리하여 어느 학자는 한국 장로교의 지나친 분열상의 원인을 장로교 지도자들의 낮은 질적 수준에 돌리기도 한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한국 교회는 지도자를 키우고 양성하는 일에 인색하다. 한국 교회의 미래가 더 나은 지도자, 실력과 영력을 갖춘 지도자에게 달려 있음을 분명하게 깨닫고 역량 있는 지도자를 양성하는 일에 노력해야 할 것이다.
1. 선교지역 분활
하나의 나라에 여러 교파 신교회 진출하여 선교함으로 야기될 수 있는 갈등과 마찰을 피하기 위해 선교회간에 지역분할이 추진되었다. 그래서 교계예양(敎界禮讓)으로 불리는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 협정의 근본목적은 '마찰의 요인이 되고 있는 선교사업의 중첩을 피하고 돈과 시간과 힘의 낭비를 줄이기 위한 것이었다. 이 협정의 주요 골자는 다음과 같다.
① 일반 원칙으로 작은 도시나 그 주변 지방을 공동 점유하는 것이 능력을 효율성 있게 활용함에 있어 가장 바람직하지 않은 것임을 확인한다.
② 5천 명 미만되는 도시에서 지방을 관장하는 한 선교사에 의해 준선교기지가 설정되어 있을 경우엔 점유된 것으로 인정하고 다른 선교회가 그곳에서 사업을 시작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③ 사업을 시작하거나 확장하려는 선교회들에겐 아직 점유되려는 선교회들에겐 아직 점유되지 않은 지역에서 착수하도록 강력히 권고하여 모든 지역에서 선교 사업이 진행되도록 추구한다.
④ 각 교회 교인들은 교파 소속을 옮길 수 있는 권리가 있다.
⑤ 서로 다른 교회의 규칙을 상호 존중한다.
⑥ 일반 원칙으로 문서들은 판매해야지 거저 주어서는 안되며 가격에 있어서도 통일성을 기해야 한다.
⑦ 조사(助事), 학생, 교사 및 보조인은 어느 분야에서 일하든 그들을 책임지고 있는 인물의 문서화된 요청이 없이는 다른 선교회로부터 어떤 형태로든 지원을 받을 수 없다.
2. 선교정책의 신조
네비우스의 선교 결과 1891년에 북장로회 선교회는 '북장로회 선교회 규칙(Presbyterian Nothem Mission Rules and By-Laws)을 제정하여 선교의 규칙으로 삼았다. 또한 1895년 10월 5일 열린 북장로회 선교회는 8개 조항을 선정하여 선교정책의 신조로 삼았다. 그 신조는 다음과 같다.
① 선교회에 속한 모든 사람은 복음주의 정책을 믿는 바이다.
② 선교회는 학교가 영어를 가르치기 위해 존재하거나 적어도 학교만을 위한 학교가 도리 수 없음을 믿는다.
③ 그러나 선교회는 초등학교의 설립을 믿는다.
④ 선교회는 본토인을 고용하여 종교 사업을 추진함에 있어 외국 선교자금 지출을 최소화시켜야 함을 믿는다.
⑤ 선교회는 본토인들이 처음부터 자급자족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바 본토인 교인들로 하여금 자기네 책을 사고 자기네 교회를 짓고 자기네 전도인 봉급을 지급하게 한다.
⑥ 선교회는 보다 정규적인 조직이 갖추어질 정도로 사업이 발전되기까지는 '네비우스 사업 방식'을 적용하여 교인 지도자들을 다른 지역에 임명하고 원입인들을 교육하기 위해 교리 학습반을 운영하며 지도자들을 훈련시키기 위해 겨울 신학반을 운영함을 믿는다.
⑦ 선교회는 선교회들 사이에 또는 개개인 선교사들간에 협정함에 있어 각각 남의 권리를 보호하고 모두에게 활동할 수 있는 충분한 여유를 제공해야 함을 믿는다.
⑧ 선교회는 사업의 모든 분야는 한 가지 목적, 즉 그리스도 안에서 영혼을 얻고 세우는 것을 위해 이루어져야 하며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교인된 자들은 성령의 손길 안에서 겸손하게 가르침을 받아야 함을 믿는다.
3. 네비우스 선교정책의 비판
네비우스 선교정책이 '하나님의 말씀을 터로 하여 자급자치의 원리 밑에 희생과 봉사를 내용으로 하는 기독교 윤리를 실천하는 데서 오늘의 큰 성과'를 얻었다.
교인들에게 자립 정신과 규칙적인 헌금 습관을 가르쳐 주었으며 한국 기독교의 서양화를 방지하였다. 한국 교회의 발전 뿐만 아니라 그 신앙의 형태라든가 교역자의 지적 수준, 교회의 조직에 대해 무시 못할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구체적인 실천 과정에서 한국 교회의 장기적인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들도 발견되었다. 대표적인 것이 한국인 교역자 양성에 관한 선교회 정책이다. 본토인 교역자를 양성하여 본토 교회를 관장케 한다는 원칙하에 선교사들은 초기부터 한국인 교역자들이 선교회에 의해 강력하게 통제받을 수 있는 상황을 견지하려 했다.
구체적인 예로 남장로회의 레이놀즈(W.D.Reynolds)가 제시한 교역자 양성 원칙을 들면 ① 누군가를 교역자로 훈련시킬 생각이 있더라도 상당 기간 비밀로 할 것, ② 가능하면 그를 전도인이나 설교자로 고용할 때 선교자금으로 급료를 주지 말 것, ③ 적어도 선교사업 초기 단계에 미국에 보내 교육을 받게 할 것 등이다. 이러한 대목들로 인해 네비우스 선교정책은 비판을 받는다.
즉 한국인 교역자의 교육수준을 일반인들의 수준 정도로 규정함으로 교역자의 자질 향상을 제도적으로 규제한 결과를 빚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한국 교회의 교역자들은 근대 교육을 받지 못한 구세대인으로 구성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한국의 교역자들은 존경과 권위의 대우를 받지 못하고 정반대의 현상을 초래하였다.
한국 교회는 선교사가 들어오기도 전에 한국에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스스로 교회를 설립한 독특한 경우에 속한다.
본 연구는 장로교와 감리교를 중심으로 한국 교회의 창립 초기 시대를 약술하고 있다. 한국 최초의 교회는 1884년 서상륜 등이 세운 소래교회(장로교)이다.
그 후 장로교는 1887년 정동교회를 세움으로 본격적으로 교회 활동을 시작했다. 감리교회는 1887년 선교사 아펜젤러 등이 세운 벧엘 예배당이 최초의 교회이다.
교회의 조직에 있어서는 1888년 선교사를 돕는 조사로 해서 1907년 서리집사, 1908년 장립집사로, 장로는 1887년 새문안교회에서 최초로 선출하였다. 목사는 감리교회에서 1901년 2명, 1902년 1명을 세운 것이 최초이고, 장로교에서는 1907년 장로교 신학교를 졸업한 7명의 목사를 세운 것이 최초이다.
한국에 있어서 교회의 설립은 매우 독특한 형태를 보이고 있다. 그것은 한국인들은 선교사가 국내에 들어오기 이전에 기독교를 믿었고, 또 조직 교회는 아니지만 이미 스스로 교회를 설립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을 위해서는 여러 방면을 통한 하나님의 섭리와 사역이 있었지만, 무엇보다는 성경 자체를 통해 신앙이 유입되었다는 것은 매우 의미있는 것이다. 본 연구에서는 한국 최초의 교회들과 그 조직, 그리고 대표적인 두 교단의 경우를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1. 최초의 교회들
1) 교회의 설립
한국에서 최초로 세워진 교회는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솔내(송천, 松川)에 세워진 소래교회이다. 이 교회는 만주에서 로스(J.Ross) 선교사와 성경번역 사역을 함께 하던 서상륜과 그의 동생인 서경조가 중심이 되어 1884년에 설립된 순수한 한국인들만의 힘으로 세워진 교회이다. 한편 언더우드는 1886년에 서상륜을 만나 1887년 9월 27일에는 서울 정도의 언더우드 선교사의 사택에서 14명의 세례교인을 중심으로 하여 한국 최초의 조직 교회인 정동교회(새문안교회의 전신)가 설립되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언더우드의 공은 적었고, 자발적으로 세례를 받고 교회 조직에 참여한 한국인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외 지역에 세워진 교회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885년에는 아펜젤러 선교사에 의해 인천에 내리 감리교회가 세워졌고, 1895년에는 전위령 선교사가 군산에 구암교회를, 1896년에는 배위량 선교사가 대구의 제일교회, 최의덕 선교사가 전주의 서문교회를 세웠다. 1893년에는 마펫 선교사가 평양에 장대현교회, 배위량 선교사가 부산에 초량교회, 그리고 소안론 선교사가 원산에 명석동교회를 세웠다.
2) 교회의 조직
한국인으로서 교회 사역에 가장 먼저 등장한 것은 조사(助事, Helper)로서 이는 선교사를 돕는 어학 선생 출신의 남자 협력자를 가리킨다. 이들은 대부분 후에 목사가 되었는데 안수받지 않은 목사라고 볼 수 있다. 조사는 1888년에 언더우드가 백홍준, 서상륜, 최명오 등을 임명한 것이 최초였다. 또한 각 선교지에서 교회를 치리하고 선교사와 조사의 위임 사항을 처리하는 영수(領袖, Leader)가 있는데, 이들은 안수 받지 않은 장로로 1894년 평양교회의 이영인이 최초의 영수이다. 다음으로 집사가 있는데, 1907년 이전에는 정동교회, 소래교회, 평양 널다리골교회에서 서리집사 제도를 실시했고, 1907년에 장립집사 제도가 시작되어 1908년 서울에 1명, 평양에 8명의 장립집사가 있었다.
장로는 1887년에 새문안교회에서 백홍준과 서상륜을 초대 장로로 선출한 것이 최초의 경우이다. 그 후 1878년에 장대현교회에서 이영인, 소래교회에서 서경조가 선출되었다. 한편 최초의 목사는 1901년 감리교에서 김창식, 김기범이 집사목사, 즉 설교권은 없고 집례권만 있는 목사로 장립되었고, 1902년에 최병헌이 설교권을 가진 목사로 장립되었다. 또한 장로교에서는 1907년 장로교 신학교를 졸업한 7명이 최초의 목사가 되었다(길선주, 방기창, 서경조, 송린서, 양전백, 한석진, 이기동)
2. 장로교회의 설립
장로교회는 1884년에 최초로 소래교회가 세워졌으며, 1885년 언더우드 선교사가 입국하여 1887년 최초의 조직 교회인 정동교회(새문안교회)를 세움으로 본격적인 교회 형성이 시작되었다. 1889년에는 선교사 공의회(연합 공의회)가 조직되었고, 1901년에는 조선예수교장로회 공의회가 조직되었다. 이 당시의 회원은 장로 3인, 조사 6인, 그리고 선교사 25인이었으며, 평양에 대한예수교장로회 신학교 설립, 한국 자유장로회 설립을 위한 신청, 미국 장로교 헌법 번역위원 채택, 〈그리스도신문〉을 공의회 발행물로 선정하는 등의 내용을 결의하였다.
1907년 9월 17일에는 최초의 독노회가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선교사 38인, 장로 40인, 그리고 내빈 3인을 회원으로 하여 소집되었다. 독노회에서는 평양신학교 1회 졸업생 7명의 목사 장립, 이기풍 목사의 제주도 선교사 파송, 평양신학교의 직영, 장로회 12신조와 장로회정치 채택 등을 결의하였다. 1912년 9월 1일에는 최초의 총회가 평양신학교에서 열렸다. 당시 회장은 언더우드였고 회원으로는 목사 52인, 장로 125인, 선교사 44인으로 총 7개 노회가 모였다. 총회에서는 총회조직 기념 선교사 파송을 결의했고 중국 산동성에 1913년에 김영훈·박태로·사병순을, 1917년에는 방로원, 홍승모를, 1923년에는 박상순, 1931년에는 김순조, 그리고 1937년에는 방지일 목사를 각각 파송했다.
3. 감리교회의 설립
감리교의 한국 선교는 1884년 미국 감리교의 가우쳐(J.F.Goucher) 목사가 일본 파송 선교사인 맥클레이(J.S.Maclay)에게 한국의 형편을 시찰하고 선교 기초를 정하라고 요청함으로 시작되었다. 맥클레이는 그해 6월 23일에 제물포에 도착하여 김옥균을 통해 선교사업을 시작했고, 7월 3일에 학교·병원의 설립을 허락받았다. 1885년에는 아펜젤러가 입국하여 6월에 배재학당을 시작했고, 9월에는 스크랜톤이 의료사업을, 1886년에는 스크랜톤의 모친이 이화학당을 시작하였다. 1887년 1월에는 아펜젤러 외 4인이 정동에 벧엘 예배당을 설립하였는데, 이것이 감리교 최초의 교회인 정동감리교회의 시작이다. 1895년에 귀국한 윤치호는 미국 감리교회에 선교사 파송 요청을 했고, 동양 선교 책임자인 헨드릭스(E.R.Hendrix) 감독과 리드(C.F.Reid) 목사가 내한하여 시찰했다. 1896년에는 리드 목사가 입국하여 활동을 시작하여 1897년에 고양읍에 남감리교회를 처음으로 설립했다. 1898년에 하디(R.A.Hardie) 부부가 입국했고, 1901년에는 미남감리회 조선연회에서 김창식, 김기범이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04년에는 개성에서 호수돈여숙(好壽敦女塾)이 시작되었고, 1906년에는 윤치호를 중심으로 한영서원이 설립되었다. 1910년에는 협성(協成)신학교가 설립되었고 1911년에는 〈그리스도회보〉가 발간되었다. 1926년에는 남북김리회 조선연회가 모여 남북감리연합방침 연구위원을 선정하였고, 1927년에 보고받아 채용하여 미국총회에 청원하였다. 1930년에 한국 통합진권 위원이 선출되어 12월 2일에 조선감리교 1회 총회가 협성신학교에서 개최되었다. 그날 10일에는 정동교회당에서 제1대 총리사로 양주삼 목사가 취임식을 가졌다.
한국 교회의 설립은 여러 방면에 걸친 하나님의 섭리 아래서 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졌다. 많은 선교사들 그리고 많은 한국인 신자들과 지도자들은 하나가 되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세우고자 노력했다. 그리하여 주님의 말씀대로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함을 역사 속에서 증명해 보였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선조들의 귀중한 유산을 물려받아 더욱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고 성숙한 교회를 만들어 나가기 위해 노력해야 하겠다. 한국 교회를 세우신 이가 하나님이시므로 그분이 또한 오늘날에도 우리 가운데서 살아 역사하심을 믿고 전진하자.
1. 최초에 설립된 교회들
①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솔내 소래(松川)교회 (184 서륜) ② 서울-새문안교회(1887. 927 언더우드) ③ 평양-장대현교회(1893 마펫 선교사) ④ 대구-제일교회(1896 배위량 선교사) ⑤ 광주-양림교회(1904 벨 선교사) ⑥ 인천-내리 감리교회(1885 또는 1886 아펜젤러) ⑦ 전주-서문교회(1896 최의덕 선교사) ⑧ 군산-구암교회(1893 전위렴 선교사) ⑨ 부산-초량교회(1893 배위량 선교사) ⑩ 원산-명석동교회(1893 소안론 선교사)
2. 한국 교회 최초의 사건들
① 수세사-노춘경(1886) ② 유아세례-서병호(서상륜의 아들 1896) ③ 영수-이영언(1894) ④ 전도인-서상륜(1894) ⑤ 교회-소래교회(1894) ⑥ 신학교 입학-김종섭, 방기창(1901) ⑦ 입교-이수정(일본 1883) ⑧ 첫 한문성경 한글번역-서상륜(1882 로스성경) ⑨ 총회-장대현교회(1912) ⑩ 당회-새문안교회(1887) ⑪ 최초의 목사-김창식, 김기범(집사목사, 신학교 졸업 않음) ⑫ 장로회 최초목사-길선주, 방기창, 서경조, 송린서, 양전백, 한석진, 이기풍
3. 예장총회 성립 경로
① 알렌 의사 부부 입국, 최초의 한국 교회인 소래교회 설립(1884) ② 언더우드, 아펜젤러 입국(1885) ③ 최초의 장로교회인 새문안교회 설립(조직교회 1887) ④ 선교사 공의회(연합공의회 1889) ⑤ 조선 예수교 장로회 공의회 조직(1901) ⑥ 미국 장로교에서 한국자유 장로교의 독립을 반대(1904) ⑦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독노회 조직, 7인 목사 장립, 제주도 선교사 파송, 12신조와 장로교 정치 채택(1907) ⑧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조직(1912)
4. 합동공의회
① 연대-1901년 ② 회원-장로 3명(서경조, 방기창, 김종섭), 조사 6명(양전택, 송순명, 최홍서, 천광실, 고찬익, 유재영), 선교사 25명 ③ 결의-평양에 대한예수교 장로회 신학교 설립, 한국자유 장로회 설립을 위한 선출, 미국 장로교 헌법 번역위원 채택, 〈그리스도신문〉을 공의회 발행물로 선정.
5. 독노회
① 연대-1907년 9월 17일 장대현교회 ② 회장-마포삼열 선교사 ③ 회원-선교사 38명, 장로 40명, 내빈 3명 ④ 결의-목사장립(7명), 선교사 파송(제주도에 이기풍 목사)평양신학교 직영, 장로회 12신조와 장로회 정치 채택
6. 최초의 총회 조직
① 연대-1912년 ② 장소-개회예배(평양 여자성경학원 강당), 회의장(평양신학교) ③ 회장-언더우드 목사 ④ 회원-목사 52명, 장로 125명, 선교사 44명(총 7개 노회) ⑤ 결의-총회조직 기념으로 중국 산동성에 선교사 파송결의(선교사-김영훈, 박태로, 사병순, 방호원, 홍승한, 박상순, 김순효, 방지일) ⑥ 산동성 선교사 파송이유-공자의 고향에서 유교보다 기독교가 우월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함.
7. 평양신학교
① 설립결의-1901년 대한예수교장로회 공의회에서 결정 ② 설립명칭-1901년 예수교 장로회 신학교(평양신학교) ③ 첫 학생-김종섭, 방기창 ④ 성격-미 남북 장로교, 호주 장로회, 캐나다 장로회가 함께 운영하는 연합 신학교 ⑤ 당시 교수-마포삼열(교장), 이길함(교수) ⑥ 과목-성경, 교회사, 조직신학, 실천신학 ⑦ 학교교사-마포삼열 목사의 사택에서 시작, 1908년 한국식 교사, 1922년 서양식 교사신축, 1913년 6동의 기숙사 건립 ⑧ 제1회 졸업생(1907)-길선주, 방기창, 서경조, 송린서, 양전백, 이기풍, 한석진 ⑨ 폐교-1938년 27회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로 인해 선교회에서 결의함
8. 네비우스 전도방법
① 발단-1890년 6월 산동성에서 존 네비우스를 초청하여 그의 선교정책을 배우고 선교 전략을 수립. ② 방법-자립(스스로 교회당 건축), 자치(스스로가 교회 다스림), 자전(스스로 정도). 상류층을 배제하고 노동자, 하층민 전도, 부녀자 어린이 전도 학교교육, 성경번역, 의료사업 등. ③ 결과-자립, 자급, 자치교회로 성장, 성경 중심 교회, 기도, 전도, 교육하는 교회, 한글보급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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