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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의 역사
네팔 역사 개요
네팔은 지리적, 역사적, 문화적으로 아시아의 몽고족과 인도의 인도 아리안족 사이에 있다. 따라서 네팔은 인도와 중국의 영향을 받았고, 교역로이었다. 네팔의 역사는 BC 7세기부터 통치한 키란티 Kirantis부터 또는 그 이전이라고 알려져 있다. 키란티는 서기 300년경 북인도의 리차비 Lichavis에게 패하여 그에게 통치를 물려주었다. 서기 7세기 리차비로부터 타쿠리 Thakuri에게 왕좌가 넘어깄다.
다음 말라왕조는 서기 1,200년경부터 550년간 네팔을 통치하면서 수많은 사원과 건축학적으로 아름다운 광장이 있는 훌륭한 왕궁을 건설하였다. 그러나 황금기 말라 후기에 카트만두 분지는 카트만두 Kathmandu(Kantipur), 박타푸르 Bhaktapur(Bhadgaon), 파탄 Patan(Lalitpur)의 세 개의 왕국으로 분할되었다. 이 세 왕국의 경쟁은 예술과 문화를 발전시키게 되었지만, 네팔은 약 46개의 독립국가로 분열되었다.
고르카에 기반을 둔 프리뜨비 나라연 사허 Prithvi Narayan Shah는 1769년에 출정하여 카트만두 분지의 세 왕국으로부터 항복을 얻어내고 그의 수도를 카트만두로 옮겨 사허왕조를 설립하였다. 그로부터 2008년까지 최후의 사허 통치자인 갸넨드라 Gyanendra까지 통일된 네팔을 통치하였다. 19세기 중반에 라나가문 Rana에서 네팔의 총리가 되어 사허 왕을 단순히 명색뿐으로 만들고 104년 동안 라나가문의 세습통치를 하였다.
1959년 초 라나가를 축출한 트리뷰반 Tribhuvan 왕은 새로운 내각을 발표하고 국가의회를 선출하는 최초의 민주주의 선거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1960년에 마헨드라 왕은 의회를 해산하여 최초의 민주정부를 사라지게 하였다. 수년간의 투쟁 후 1990년 시민운동이 시작되고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민중의 봉기로 비렌드라 Birendra 왕은 조직의 개편을 받아드리고 의회를 확립하였다. 1991년 5월에 네팔은 첫 번째 하원의원의 선거를 실시하였다. 1996년 2뤌 마오 정당의 하나는 군주와 선출된 정부에 대항하려고 민중전쟁을 수행하기 위하여 지하로 숨어들어 투쟁을 가속화 하었다.
2001년 6월 디펜드라 Dipendra 왕세자는 친족과 함께 왕족을 일소하였고 본인도 머리에 총을 쏴 자살하였다. 비렌드라 왕의 형인 갸렌드라 Gyarendra와 그의 가족은 살아남아서 왕위를 이어 받았다. 갸렌드라 왕은 절대 권력을 장악하기 위하여 의회를 해산하였다. 2006년 4월 카트만두에서의 파업과 거리항쟁이 시작되었고, 2008년 5월 28일 새롭게 선출된 의회는 240년의 군주제를 철폐하고 네팔을 민주공화연방으로 선포하였다. 오늘날의 네팔은 국가의 수반으로서 대통령, 정부의 수반으로서 총리가 있다.
키란티 시대
기록된 네팔의 역사는 카트만두 분지가 중심이 되었다. 옛 인도 힌두의 대서사시인 마하바라타 Mahabharata에도 언급이 된 유명한 왕 얄룸베르 Yalumber가 통치하던 B.C 7세기 또는 8세기부터 시작되어 수세기 동안 통치한 키란티 Kirantis부터 본격화되었다. 목자牧者였던 고팔라 Gopalas는 키란티 이전에 통치하였다고 믿었으나 그들에 대해서 알려진 것이 매우 적다. 그들의 후예들은 아직 분지의 언저리 어딘가에 살고 있다고 전해지고 있다. 서기 300년 경 리차비 Lichavis는 북인도로부터 이곳에 도착하여 키란티를 물리쳤다.
키란티 시대에 불교가 처음 들어왔다. 28대 왕 재위 7년에 Buddha가 그의 제자 Ananda와 함께 이 유역을 방문하고 파탄에서 잠시 머물렀다고 한다. 기원전 2세기경 인도의 아쇼카대왕이 네팔을 방문했으며 지금의 인도와의 국경 근처, 포카라 남쪽에 있는 Buddha의 탄생지인 룸비니에 표주(標住,pillar)를 하나 세웠다. 그는 또한 카트만두 유역을 방문했으며, 파탄 부근에 세웠던 4개의 사리탑(stupa) 흔적은 지금도 확연히 볼 수가 있다.
리차비외 타쿠리 시대
키란티의 후예는 동부 네팔에 주로 살고 있는 라이 Rais와 림부 Limbus 족이다. 리차비 유산 중의 하나는 5세기를 거슬러 올라간 박타푸르 근처의 전설적인 짱구나라연 Changu Narayan 사원이다. Kirati의 마지막 왕을 굴복시킨 인도-아리안족의 Licchavi시대에는 불교가 쇠퇴했고 힌두교가 다시 자리메김을 했다.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네팔의 카스트 계급은 이들 아리안족과 함께 들어온 것이지만 네팔 예술과 건축의 황금시절을 이끌기도 했다.
서기 7세기 초 첫 번째 타쿠리 Thakuri 왕인 암슈바르만 Amshuvarman은 그의 장인인 리차비로부터 왕좌를 찬탈하였다. 그는 그의 딸인 브리쿠티 Bhrikuti를 유명한 티베트의 왕인 총첸감포 Tsong Tsen Gampo에게 시집보내어 티베트와 좋은 관계를 다지게 되었다. 브리쿠티는 그 왕을 불교도로 개종하였다. 리차비는 이 계곡에 예술과 건축술을 전파하였으나 창조의 황금시대는 서기 1,200년 권력을 쥔 말라 Mallas 왕조와 같이 도래하였다. 지금의 카트만두인 칸티푸르 Kantipur는 10세기 경에 건립되었다고 한다. 도시의 이름은 그의 소유였던 목조주택이란 뜻인 카스타만다프 Kasthamandap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하며, 지금도 카트만두의 덜발 광장 Durbar Square에 가면 볼 수 있다.
말라의 황금기
550년의 통치기간 동안 말라는 놀라우리만큼 수많은 사원과 건축학적으로 아름다운 사원이 줄지어 있는 그림 같은 광장이 있는 훌륭한 왕궁을 건설하였다. 또한 그의 통치기간 중에 사회와 도시는 잘 정비되고, 종교적 축제가 도입되고, 문학, 음악, 예술은 고무되었다. 이 황금기의 카트만두 유역엔 풍요가 흘러 넘쳤으며, 오늘날 볼 수 있는 훌륭한 건축물 대다수가 이 시절에 설립된 것이다. 하지만 Malla 초기에는 여러 차례 재해가 있었다. 엄청난 지진으로 수천 명이 죽었고, 연이은 서북쪽의 침략을 받고 1311년엔 파탄(Patan)이 파괴되었다.
야크사 말라 Yaksha Malla의 죽음 후에 이 분지는 카트만두 Kathmandu(Kantipur), 박타푸르 Bhaktapur(Bhadgaon), 파탄 Patan(Lalitpur)의 세 개의 왕국으로 분할되었다. 이 세 왕국의 경쟁은 웅대한 왕궁건물을 짓고 예술과 문화를 발전시키게 되었다. 이 시기에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네팔은 약 46개의 독립국가로 분열되었다. 이 중에 하나인 사허 Shah 왕이 권력을 쥔 고르카 왕국이 있었다. 이 시기에 수많은 카트만두 계곡의 역사가 이곳에서 그들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티베트의 승려들에 의하여 기록되었다.
통일왕조 사허 시대
푸리뜨비 나라연 사허 Prithvi Narayan Shah라는 이름의 야심만만한 고르카의 9대 왕은 독립국가인 키르티푸르 Kirtipur를 포함하여 이 계곡에 있는 모든 왕국을 패퇴시켜 정복할 임무를 띠고 1769년에 출정하였다. 새롭게 획득한 국가를 그의 고르카 왕국에 부속시키는 대신에 푸리뜨비 나라연은 그의 수도를 카트만두로 옮겨 사허 왕조를 설립하였다. 1769년부터 2008년까지 최후의 사허 통치자인 갸넨드라 Gyanendra가 수상이 통치하는 민주주의 정부에게 그의 권력을 포기할 때까지 통일된 네팔을 통치하였다.
고르카의 역사는 드라브야 사허 Dravya Shah가 마가르 Magars 족이 주로 거주하는 지역에 왕국을 설립한 시기인 1559년으로 되돌아간다. 이 시기에 카트만두 계곡은 말라 왕조가 통치하고 있었다. 17세기에서 18세기 초까지 고르카는 다른 나라와 동맹을 가장하여 많은 국가를 정복하면서 서서히 확장을 지속하였다. 푸리뜨비 나라연은 나이가 어릴 적부터 카트만두 계곡을 정복하는데 그 자신을 바쳤다.
19세기 초까지 카시미르에서 시킴지방으로 계속 뻗어온 네팔의 영토 확장은 라지 Raj(인도의 주권)와 문제를 일으키게끔 되었고, 테라이 Terai지대(네팔 남부의 저지대)에 대한 불화는 영국과의 전쟁으로 이끌고 갔다. 1810년 네팔은 거의 지금의 두 배 정도의 크기였으나 1816년 영국과의 쑤가울리 협정(Sugauli Treaty)으로 영토 확장은 끝을 맺게 되었다. 영국은 시킴과 Terai지대 대부분을 차지했으며 오늘날의 네팔 동부와 서부 국경이 그렇게 형성되었다. 영국이 통치하던 British Raj의 위협을 느끼자 유럽의 선교사를 네팔에서 떠나게 하였고, 한 세기 동안 네팔은 고립되어 있었다.
한편 네팔인들의 전투 소질에 매료된 영국은 구르카 Gurkha로 알려진 용병을 영국군에 데리고 갔다. 그 후 용병 구르카는 영국군에서 싸웠으며, 1982년 포클랜드 전쟁 중에 아르헨티나인들 사이에 공포의 대상으로 알려졌다. 오늘날 이들 구르카가 벌어들이는 돈은 네팔의 주요한 소득원이다. 영국에서의 구르카 부대의 중요성은 쇠퇴하고 있지만, 여타 나라에선 여전히 그 군사적 능력에 기꺼이 돈을 지불하고 있다. 예로서, 브루네이의 술탄에게는 구르카 부대로 이루어진 군단이 있다.
라나의 지배
서부 네팔 출신으로 잔인하고 야심찬 젊은 귀족계급 체트리 Chhetri인 정 바하두르 라나 Jung Bahadur Rana는 1846년 9월 15일 쿠테타를 일으켰다. 그는 수상직에 오르고 직함을 마하라자 Maharajah(군주)로 올리고는 세습직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사허 왕을 단순히 명색뿐으로 만들고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104년 동안 수상직을 세습받은 Rana 가문이 권력을 잡아 비록 네팔의 발전은 정체되었지만, 유럽 세력이 방위력이 약한 나라를 낡아채 식민지화하는 시기에도 나라의 독립만은 지킬 수가 있었다. 네팔은 타국의 식민지로 지배를 받은 적이 결코 없지만, 바로 이 Rana 시대에는 외부세계로 부터 완전히 격리되어 있었다.
정 바하두르 라나는 1850년 유럽을 여행하고 신고전주의 건축양식을 들여왔다. 그 예는 지금도 카트만두에서 찾아 볼 수 있다. Rana의 업적으로 수티 Suttee(미망인을 죽은 남편과 함께 화장시키는 힌두 관습)가 폐지되었고, 강제노역이 종식되었고, 카트만두에 학교와 대학이 설립되었다. Rana와 그의 친족들이 거대한 카트만두 궁전에서 호사롭게 사는 동안, 구릉지대의 농민들은 중세의 생활 속에 갇혀있었다.
이 무렵 다른 곳에선 급격한 변화가 일고 있었다. 2차 대전 후 인도는 독립을 얻었고, 중국에서는 혁명이 일어났다. 중국의 새로운 인민공화국이 티베트를 합병하자 티베트의 난민들이 네팔로 흘러들어왔다. 네팔은 아시아 두 대국간의 완충지대가 되었다. 그러한 소요가 자연히 네팔의 폐쇄된 국경 너머로 퍼졌고 빈사상태의 정치체제를 자유화하자는 쪽으로 다가서는 라나가 있는 반면에 다른 라나는 중앙의 통제가 더욱 강력해져야 한다는 쪽으로 움직였다. 강한 지도력을 갖춘 BP Koirala의 지도하에 인도의 여당인 India Congress Party의 지원을 받으며 라나가문의 사람을 포함한 다수의 네팔인에 의해 네팔리 회의(The Nepali Congress)가 창당되었다. 그와 동시에 궁궐에 갇혀 잊혀졌던 트리뷰반 왕은 라나가문을 전복시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사허왕조의 복귀
궁궐에 갇혀있다 피난과 망명생활을 거듭하던 트리뷰반 왕은 인도와 코이랄라 BP Koirala 군대의 도움으로 네팔로 돌아가 Rana와 BP Koirala의 NC의 평민으로 구성된 새 정부를 세웠다. 1959년 초 트리뷰반 왕은 새로운 내각을 발표하고 국가 의회를 선출하는 최초의 민주주의 선거를 실시하였다. 네팔 의회당(NC)이 승리하였고 그들의 리더인 코이랄라 Bishweshwar Prasad Koirala는 정부를 구성하고 초대 총리로 봉사하였다. 하지만 1960년대 말, 국왕은 정부의 업무 수행이 온전치 못하다고 판단하고 내각을 구금했다. 정치적 모임이 금지되고, 국왕은 의전상의 역할에서 벗어나 실질적 통치자가 되었다. 그러나 1960년에 마헨드라 왕은 그의 마음을 바꾸어 의회를 해산하여 최초의 민주정부를 사라지게 하였다.
1990년 초반까지 국왕은 엄청난 권력을 휘둘렀다.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없지만 헌법은 그의 최고 주권을 보장했고 National Panchayat(국가의회)는 고무도장으로써 기본적 활동만 했다. 귀족들은 일반적으로 그 영향력과 부를 유지해 나갔고 (국왕과 그 형제들은 모두 Rana와 결혼했다), Panchayat 체제는 그에 대한 통제를 못하는 것 같았다. 확실한 수치는 찾아내기 어렵지만 외국원조의 상당 부분이 당연하단 듯이 뭉쳐나가 왕가와 내각의 계좌로 들어갔다.
민주주의와 현대
수년간의 투쟁 후에 정당활동이 금지되었을 때, 1990년 시민운동이 시작되기에 충분한 용기가 모아졌다. 절대군주에 대항하고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민주의 봉기로 비렌드라 Birendra 왕은 조직의 개편을 받아드리고 다수당의 의회를 확립하였다. 1991년 5월에 네팔은 첫 번째 하원의원의 선거를 실시하였다. 1996년 2뤌 마오 정당의 하나는 군주와 선출된 정부에 대항하려고 무자비한 민중전쟁을 수행하기 위하여 지하로 숨어들었다.
2001년 6월 1일 무서운 비극이 가까운 친족과 함께 왕족을 일소하였다. 이 대량학살은 단숨에 그들을 죽인 디펜드라 Dipendra 왕자에 의하여 저질러졌고 결국 본인도 머리에 총을 쏴 자살하였다. 비렌드라 왕의 형인 갸렌드라 Gyarendra와 그의 가족은 살아남아서 왕위를 이어 받았다. 갸렌드라 왕은 아주 잠시 동안만 선출된 정부를 관대하게 대했고, 그리고 나서 절대 권력을 장악하기 위하여 의회를 해산하였다.
2006년 4월 카트만두에서의 파업과 거리항쟁은 19일 동안의 야간통행금지로 이어졌고 잘못된 군주에게 압박을 주기위하여 정당들은 마오 반역자와 같이 힘을 결집하였다. 결국 갸넨드라 왕은 권력을 쥐는 것이 부질없다는 것을 깨닫고 누그러졌다. 그는 의회를 본래대로 유지하는 데에 동의하였다. 그러나 정당과 대다수 민중은 군주통치와 권력남용을 충분히 겪었다. 2008년 5월 28일 새롭게 선출된 의회는 240년의 군주제를 철폐하고 네팔을 민주공화연방으로 선포하였다. 오늘날의 네팔은 국가의 수반으로서 대통령, 정부의 수반으로서 총리가 있다.
(참고) 네팔의 역사 - 론니 프레닛
네팔은 역사적, 문화적, 그리고 언어학상으로 아시아의 몽고인(티벳버미즈어족)과 인도 평원의 코카서스인(인도유로피언어족)이 서로 만나는 지점이다. 일찌기 네팔은 이러한 인도와 중국간의 교역적 위치를 잘 이용해왔으며, 오늘날에도 네팔은 이 두 대국사이에서 그 전략적 위치에서 오는 이점을 계속 잘 지켜가고 있다. 네팔의 국경은 수 세기가 넘게 이웃 인도 지역을 포함할 만큼 확장된 적도 있고, 카트만두 유역과 그 주변의 다수 도시국가들만으로 이루어질 정도로 그 영역이 축소되기도 했다.
전설에 의하면, 한 때는 호수였던 카트만두 유역을 Manjushri(만주스리)가 마검으로 그 벽을 뚫어 물을 빼낸 후 현재의 카트만두 유역을 만들었다고 한다. 어떤 이는 Manjushri가 아니고 중국에서 온 스님이었다고 한다. 힌두교도들은 천둥번개를 뿌려서 Chobar Gorge(쵸바르 계곡)를 만든 전능하신 Krishna(크리스나)였다고 주장한다. 전설이야 어찌되었든, 카트만두 유역엔 한차례 융기가 있었고, 실제로 이 유역의 강들도 Chobar의 협곡을 따라 남쪽으로 흐르고 있다는 점을 과학자들은 인정한다.
1. The Kiratis (키라티)
네팔의 역사는 기원전 7, 8세기경 동쪽에서 네팔로 이주해 온 몽고인들이 이룩한 Kirati에 대한 기술로 시작된다. 몽고인이 최초로 카트만두 유역을 지배한 것은 알려져 있지만 힌두의 서사시 'Mahabharata'(마하바라타)에 나와 있는 초대왕 Yalambar(얄람바르)에 대한 언급, 그 이상은 알려진 것이 없다. Kirati 시대에 불교가 처음 들어왔다. 28대 왕 재위 7년에 Buddha가 그의 제자 Ananda와 함께 이 유역을 방문하고 파탄에서 잠시 머물렀다고 한다.
그 밖에는 Kirati 시대인 기원전 4세기경에 양을 키웠고 농업 활동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기원전 2세기경 인도의 아쇼카대왕이 네팔을 방문했으며 지금의 인도와의 국경 근처, 포카라 남쪽에 있는 Buddha의 탄생지인 룸비니에 표주(標住,pillar)를 하나 세웠다. 그는 또한 카트만두 유역을 방문했으며, 파탄 부근에 세웠던 4개의 사리탑(stupa) 흔적은 지금도 확연히 볼 수가 있다. Bodhnath(보드나트)과 Swayambhunath(스와얌부나트)에도 탑을 세웠던 것 같다. 아쇼카대왕의 딸 Charumati(챠루마티)는 카트만두와 Bodhnath사이의 노상에 작은 마을 Chabahil(챠바힐)을 세웠다. 지금은 카트만두에 흡수되어 버렸지만, 그곳의 사리탑 하나는 Bodhnath에 있는 사리탑의 완전한 축소판이다. 그 곳 사원도 그녀가 네팔에 있을 때 세워진 것이라고 한다. Kirati의 지배는 기후 300년경에 끝을 맺었지만 동부 네팔의 Rai족과 Limbu족이 현재 그 후예로 알려져 있다.
2. The Licchavis (리차비)
300년경에 북인도로부터 침입하여 Kirati의 마지막 왕을 굴복시킨 인도-아리안족의 Licchavi시대에는 불교가 쇠퇴했고 힌두교가 다시 자리메김을 했다.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네팔의 카스트 계급은 이들 아리안족과 함께 들어온 것이지만 네팔 예술과 건축의 황금시절을 이끌기도 했다. 릭카비의 정치력과 군사력은 마나데바(Manadeva) 1세 때에 완비되었다. 476년에 기록된 명문(銘文)에 그의 무용담이 들어있다. 그 명문은 카트만두유역 동부에 있는 아름다운 절, 챤구 나라얀(Changu Narayan Temple)에 가면 볼 수 있다. 그 후계자 Manadeva 2세는 왕국 주변에 수많은 석문(石文)을 남겼는데, 그 대부분이 어머니에 대한 사모의 정을 담고 있다.
3. The Thakuris (타쿠리)
타쿠리의 첫번째 왕인 Amsuvarman(암수바르만)은 602년에 그의 장인인 Licchvi를 이어 권좌에 오른다. Amsuvarman은 남북간의 정략적인 가족관계를 통해 권력을 강화했다. 그의 딸 Bhrikuti(브리쿠티)는 티벳의 왕자와 결혼을 했고 Buddha의 탁발 보시기를 지참금으로 가지고 갔다. Bhrikuti는 티벳 불교에 나오는 Green Tara의 화신이란 얘기를 들었다. Green Tara의 모습은 목면에 그리는 티벳화, 'thangkas(탕카스)'에 많이 그려 있다. Amsuvarman은 Pashupatinath(파슈파티나트) 가까이 있는 Deopatan(데오파탄)에 장대한 7층 궁전을 건축했다. 또 그의 화려한 생활상에 대한 당시의 기록도 있다. Amsuvarman 왕조는 타쿠리시대의 세 왕조 중 하나였으며, 그 이후 수 세기는 침략과 내란의 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카트만두 유역의 전략적 위치를 바탕으로 왕국을 견고하게 유지 성장시켰다. 지금의 카트만두, Kantipur(칸티푸르)시는 10세기 경 Gunakanadeva(구나카나데바)에 의해 건립되었다고 한다. 도시의 이름은 그의 소유였던 Kasthamandap(카스타만다프;목조주택이란 뜻)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하며, 지금도 카트만두의 두르바르 광장(Durbar Square)에 가면 볼 수 있다.
4. The Golden Age of the Mallas (황금기 말라)
전설은 언제나 그런 식이지만, 1200년 Arideva(아리데바)왕이 자신의 아들이 태어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레슬링을 하고 있었다. 왕은 즉시 아들의 이름을 레슬러 즉, 'malla'라고 했다. 그렇게 해서 그 이름도 유명한 Malla 왕조가 건립되었다. 이 황금기의 카트만두 유역엔 풍요가 흘러 넘쳤으며, 오늘날 볼 수 있는 훌륭한 건축물 대다수가 이 시절에 설립된 것이다. 하지만 Malla 초기에는 여러 차례 재해가 있었다. 엄청난 지진으로 수천 명이 죽었고, 연이은 서북쪽의 침략을 받고 1311년엔 파탄(Patan)이 파괴되었다.
힌두인이었던 Malla왕들은 Shiva를 신봉했지만 Vishnu신의 화신으로 여겨졌다. 불교에 대한 포용으로 히말라야 탄트라 불교가 계속 번영했다. Malla의 지배하에서는 귀족계급이 성장했고, 힌두 카스트 제도는 힘을 얻어 더욱 굳건히 확립되었다. Hari Singh은 1325년과 1330년 사이에 이 유역에 들어왔다. 그는 이름난 초기 Malla 지배자들 중 한 명으로서, 그로 인해 Taleju Bhawani가 네팔 왕가의 여신이 되었다. 남인도의 Hari Singh 추종자들을 Newar(네와르)라고 했던 것 같다. 지금도 카트만두 유역의 사람을 그렇게 부르고 있다.
이 시기의 네팔은 왕과 왕자들간의 빈번한 불화로 인해 수 개의 독립된 도시국가로 분리되기 시작했다. 농업기술의 발전으로 더욱 밀집해서 정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Bengal로부터 모슬렘족이 침입해 이 유역을 휩쓸었고 힌두교와 불교 사원을 손상했다. 모슬렘의 파괴의 물결은 네팔에선 곧 바로 지나갔지만, 인도에선 그 피해가 좀 더 넓었고 많은 힌두인들이 평원에서 밀려나와 네팔의 언덕이나 산에다 소규모의 Rajput(라즈풋:무사계급, 크샤트리아) 공국을 세웠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네팔이 당시엔 46개의 작은 국가로 분리되어 있었다. 이들 왕국은 각국마다 주화를 제조했고 상비군이 있었다.
카트만두 유역에 지금도 남아있는 3개의 마을 카트만두(Kathmandu), 파탄(Patan), 박타퍼르(Bhaktapur)는 3개의 독립된 왕국이었다. 각국의 왕들은 사원의 건설과 예술품의 창작을 북돋웠다. 도시는 왕궁을 중심으로 집중되어 있었고, 귀족과 카스트의 고위 계급일수록 왕궁 가까이 몰려있었다. 높은 벽을 쌓아 도시 주변을 둘러 쌓다.
1372년 Jayasthiti Malla는 Malla의 세번째 왕조를 건립하고 먼저 파탄을, 10년 후엔 박타퍼르를 흡수해 전 유역을 통일했다. 15세기 Malla의 예술과 문화는 그 최고봉에 오르고 Yaksha Malla(1428-82)의 재위동안 왕국은 남으론 갠지즈강, 북으론 티벳, 서쪽으론 칼리 칸다키강, 그리고 동으로는 식킴(Sikkim)까지 그 영토가 확장되었다. 하지만 그의 사후 왕국은 다시 몇 개의 소국으로 나뉘고 2세기간 분쟁이 계속되었다. 무역이 활기를 띄었고 농업은 번영했으며 사원과 궁의 축조로 마을은 흥청거렸다. 그러나 Malla왕국의 지속적인 분란은 결국 새 왕조 등장의 서막이 되었다.
5. The Shah Dynasty Unifies Nepal (통일 왕조 샤허 Shah)
Shah(샤흐)조의 왕들은 카트만두에서 포카라 사이 중간지점인 고르카(Gorkha)의 작은 왕국에서 자신들의 세력을 증대시키며 부유한 카트만두 유역을 정복하려는 꿈을 키웠다. 1768년 9대왕 Prithvi Narayan Shah(프리트비 나라얀 샤흐)는 카트만두 유역을 정복하고 수도를 카트만두로 옮겼다. 오늘날까지 지속된 Shah왕조는 이렇게 수립되었다. 이 새 거점을 바탕으로 왕국의 세력 확장은 티벳에서 중국과의 한 판이 치욕적인 패배로 끝날때까지 계속되었다. 1790년 네팔인들이 먼저 중국과 싸움을 하였지만 1792년 중국군이 반격을 했고 그 결과로 맺어진 조약으로 네팔인은 티벳에 대한 공격을 중지하고 베이징의 중국 황제에게 공물을 바쳐야만 했다. 이 공여는 1912년까지 지속되었다. 이 시기에 인도 대륙에서는 영국이 그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1972년에는 카트만두에 영국의 특사가 들어왔지만 중국의 침략에 대항하는 네팔인들을 돕기에는 너무 늦었다. 영국과의 협약에도 불구하고, 19세기 초까지 카시미르에서 식킴지방으로 계속 뻗어온 네팔의 영토 확장은 Raj(라지:인도의 주권)와 문제를 일으키게끔 되었고, Terai지대(히말라야 남쪽 산기슭의 저지대)에 대한 불화는 영국과의 전쟁으로 이끌고 갔다. 1810년 네팔은 거의 지금의 두 배 정도의 크기였으나 1816년 영국과의 쑤가울리 협정(Sugauli Treaty)으로 영토 확장은 끝을 맺게 되었다. 영국은 씩킴과 Terai지대 대부분을 차지했으며 오늘날의 네팔 동부와 서부 국경이 그렇게 형성되었다. 작금의 인도에선 독립전쟁이라 일컬어지는 인도폭동 중에 네팔이 영국을 지원한 보상으로, 1858년 네팔의 영토 일부가 반환되었다.
쑤가울리 협정으로 네팔내 인도에 대한 상업적 영향력에 대한 문호를 개방했고, 그로부터 1세기 후 인도와 티벳간 직교역 루트가 새롭게 개설되었을 때, 네팔인들은 이 두 국가간의 교역 중개국으로서의 영향력 또한 상실하기 시작했다. 영국은 주재원 한 명을 카트만두에 보내 이에 대한 감시를 했다. 영국인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네팔인들은 병에 걸리기 쉬운 악령의 휴식처로 여기던 땅을 그에게 할당했지만 영국인은 개의치않고 견뎌냈다. 사실 이 패배로 가슴이 사무친 네팔인들은 외국과의 접촉을 일체 끊기로 결심하고 1816년에서 1951년까지 외부인에게는 국경을 봉쇄해 버렸다. 백 년이 넘게 카트만두 주재 영국인들만이 네팔을 지켜볼 수 있는 유일한 서양인이었다. 하지만 많은 네팔인들이 외부세계를 쳐다보고 있었다. 네팔인들의 전투 소질에 매료된 영국인은 '구르카(Gurkha)'로 알려진 용병을 영국군에 데리고 갔다. 그 후 용병 구르카는 영국군에서 싸웠으며, 1982년 포클랜드 전쟁중에 아르헨티나인들사이에 공포의 대상으로 알려졌다. 오늘날 이들 구르카가 벌어들이는 돈은 네팔의 주요한 소득원이다. 영국에서의 구르카 부대의 중요성은 쇠퇴하고 있지만, 여타 나라에선 여전히 그 군사적 능력에 기꺼이 돈을 지불하고 있다. 예로서, 브루네이의 술탄에게는 구르카 부대로 이루어진 군단이 있다.
6. The Ranas (Rana의 지배)
Shah 왕조가 집권을 계속했지만, 1846년 Jung Bahadur Rana가 공작한 Kot Massacre(코트 학살)이라는 교묘한 궁궐 반란이 일어났다. Jung Bahadur(중 바하두르)는 서부 네팔 출신으로 잔인하고 야심찬 젊은, 귀족계급 Chhetri(츠헤트리)였다. 가끔 피를 동반하기도 하는 왕실내의 복잡한 권력투쟁을 이용해 자신의 세력을 키웠다. 1846년 9월 15일 결정적인 쿠테타를 일으켰다. 카트만두의 두르바르 광장에 붙어있는 조정안뜰 Kot에 모여있던 세 왕국의 핵심 요인(귀족, 군인, 조정 중신) 수 백명을 그의 군대가 학살했다. Jung Bahadur는 수상의 직함을 취하고 자신의 성을 좀 더 알려진 Rana로 바꿨다. 그 후, 그는 직함을 maharajah(군주)로 올리고는 세습직으로 만들었다. Rana들은 왕국내에서 서열 두번째의 왕족으로 실권을 거머쥐고는 Shah 왕들을 제멋대로 부리면서 명목상의 자리만 지키게 했다. 1세기가 넘게 수상직을 세습받은 Rana 가문이 권력을 잡아 비록 네팔의 발전은 정체되었지만, 유럽 세력이 방위력이 약한 나라를 낡아채 식민지화하는 시기에도 나라의 독립만은 지킬 수가 있었다. 네팔은 타국의 식민지로 지배를 받은 적이 결코 없지만, 바로 이 Rana 시대에는 외부세계로 부터 완전히 격리되어 있었다. 아주 드문 경우에만 방문자들이 네팔로 들어오도록 허락을 받았지만 그 경우에도 아주 한정된 지역만을 방문하도록 허락했다. Jung Bahadur Rana는 1850년 유럽을 여행하고 신고전주의 건축양식을 들여왔다.(그 예는 지금도 카트만두에서 찾아 볼 수 있다.) Rana의 업적으로 'suttee'(미망인을 죽은 남편과 함께 화장시키는 힌두 관습)가 폐지되었고, 강제노역이 종식되었고, 카트만두에 학교와 대학이 설립되었다. Rana와 그의 친족들이 거대한 카트만두 궁전에서 호사롭게 사는 동안, 구릉지대의 농민들은 중세의 생활 속에 갇혀있었다.
이 지역내 다른 곳에선 급격한 변화가 일고 있었다. 이차대전후 인도는 독립을 얻었고, 중국에서는 혁명이 일어났다. 중국의 새로운 인민공화국이 티벳을 합병하자 티벳의 난민들이 네팔로 흘러들어왔다. 네팔은 아시아 두 대국간의 완충지대가 되었다. 그러한 소요가 자연히 네팔의 폐쇄된 국경 너머로 퍼졌고 빈사상태의 정치체제를 자유화하자는 쪽으로 다가서는 Rana가 있는 반면에 다른 Rana는 중앙의 통제가 더욱 강력해져야 한다는 쪽으로 움직였다. 강한 지도력을 갖춘 BP Koirala의 지도하에 인도의 여당인 India Congress Party의 지원을 받으며 Rana 가문의 사람을 포함한 다수의 네팔인에 의해 네팔리 회의(The Nepali Congress)가 창당되었다. 그와 동시에 궁궐에 갇혀 잊혀졌던 Tribhuvan 왕은 Rana 가문을 전복시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7. The Shah's Restoration (샤허 왕조의 복구)
1950년대 말 국왕은 자신의 궁에서 인도 대사관으로, 다시 대사관에서 인도로 피신을 했다. 그 사이 BP Koirala의 군대는 Terai지대 대부분을 Rana로 부터 확보하게 되고 국경 마을 Birganj부터 임시 정부를 수립했다. 네팔은 소요 상태로서 어느 쪽의 승리도 장담할 수 없었다. 마침내 인도는 영향력을 발휘하며 해결책을 협의했다. 1951년 Tribhuvan 왕은 네팔로 돌아가 Rana와 BP Koirala의 NC의 평민으로 구성된 새 정부를 세웠다. 네팔은 오래 동안 폐쇄했던 문호를 서서히 재개하고 여러 다른 국가와 관계를 수립했지만, 새로운 민주제도에 대한 꿈은 영구히 실현되지 못했다. Tribhuvan 왕이 1955년에 죽고 그의 아들 Mahendra가 뒤를 이었다. 새 헌법에선 의회내각제를 채택했고, 1959년 네팔에선 사상 초유의 총선이 치뤄졌다. 국왕에게는 놀라운 일이였지만, NC의 깨끗한 승리였고 BP Koirala는 새로운 수상이 되었다. 하지만 1960년대 말, 국왕은 정부의 업무 수행이 온전치 못하다고 판단하고 내각을 구금했다. 정치적 모임이 금지되고, 국왕은 의전상의 역할에서 벗어나 실질적 통치자가 되었다.
1962년 Mahendra 국왕은 네팔에서는 정당없는 간접적 'panchayat' 체제가 더욱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local panchayat(지방 의회)가 그 지역 의회의 대표자를 선출하고, 그런 다음 그 대표자들이 National Panchayat (국회)에서 지역을 대표했다. 그러나 실권은 국왕에게 남아있었다. 행정권을 쥐고 35명의 NP 의원중 16명을 직접 뽑았으며, 수상과 각료를 임명했다. 1972년 Mahendra가 죽고, 이튼과 하바드에서 수학한 그의 아들 Birendra가 뒤를 이었다. 네팔이 올바른 정치체제를 지니고 있다는 그의 견해에 모든 사람이 지지하진 않았다. 70년대엔 저성장, 관료의 부패, 물가 상승에 대한 불만이 일반적으로 들끓고 있었다. 1979년 마침내 끓어오른 분노가 카트만두에서 폭거로 폭발했다. Birendra 왕은 panchayat 체제와 정당 활동에 의한 정치체제 중 하나를 선택하는 국민투표를 실시하겠다고 발표했다. 1960년 이후 투옥과 망명생활을 해오던 BP Koirala에게 유세 활동이 허여됐지만, 1980년 국민투표의 결과는 55대 45로 panchayat 체제를 지지했다. 그렇지만, 국왕은 투표의 결과와 상관없이 국민들이 5년 임기의 입법부를 선출할 것이며 그런 후에 국회가 수상을 선출할 것이라고 이미 선언을 했었다. 하지만 국왕은 여전히 입법부의 20%를 임명할 것이며, 모든 후보들은 국가가 승인한 6개의 조직중 하나에 소속해야하며 자신의 이름으로 나서야했지 결코 어느 정당의 대표자로서 나서는 것은 금했다. 1981년 이러한 제도하의 첫번째 선거가 치뤄졌다. 비밀투표와 보통선거권을 인정하는 Panchayat 체제는 표면상으론 독재가 아닌 것처럼 보였다. 이론상으론 언론의 자유와 평화적 집회의 자유, 정당 활동 모색을 위한 것만 아니면, 조합과 단체 결성권을 헌법으로 보장했다. 현실은 좀 달랐다. 네팔의 군경(軍警)은 공개적으로 설명이 불가능한 기관이였고 또한 엄격한 검열도 실시했다. 집단 체포, 정치활동 용의자에 대한 고문과 매질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있다. 주요 야당인 Nepali Congress의 지도자들은 1960년부터 1990년까지 감옥을 들락거리며 세월을 보냈다. (BP Coirala는 1983년에 죽었다.) 1990년 초반까지 국왕은 엄청난 권력을 휘둘렀다.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없지만 - 궁의 내부사정과 국왕과 각료들간의 관계는 공개되지 않았다 - 헌법은 그의 최고 주권을 보장했고 National Panchayat(국가의회)는 고무 도장으로써 기본적 활동만 했다. 귀족들은 일반적으로 그 영향력과 부를 유지해 나갔고 (국왕과 그 형제들은 모두 Rana와 결혼했다), panchayat 체제는 그에 대한 통제를 못하는 것 같았다. 확실한 수치(아마도 최고 50%)는 찾아내기 어렵지만 외국원조의 상당 부분이 당연하단듯이 뭉쳐나가 왕가와 내각의 계좌로 들어갔다.
8. People Power(국민의 힘)
1989년 국왕을 헌법상 수반으로 하는 다당 민주주의 쟁취를 위해 야당이 연합을 했다. 이 최고조의 저항을 Jana Andolan 혹은 People's Movement라고 했다. 인도정부의 봉쇄로 인한 경제적 문제도 부분적인 원인이었지만 공공연한 부패에 대해 만연해 있던 불만이 대중적 지지를 유발시켰다. 1990년 2월 정부는 비폭력적 항의집회를 총탄, 최루개스, 엄청난 수의 체포와 고문으로 반응했다. 하지만 7개월에 걸친 간헐적 폭동, 타종, 파업의 성공, 그리고 여러 외국 원조국의 압력으로 정부는 물러설 수 밖에 없었다. 국민들의 승리는 값싸게 얻은 것이 아니었다. 어림잡아도 죽은 사람의 수가 300명이 훨씬 넘을 정도였다. 4월 9일 국영방송에서 국왕은 정당활동에 대한 해금을 발표했고, 4월 16일에는 야당이 임시정부를 이끌어주길 청한다. 그는 또한 헌법상 군주로서의 역할을 맡을 용의가 있음을 알렸다.
9. Democracy(민주주의)
1991년 3월, 20개 정당이 205개의 의석을 두고 총선에 나섰다. NC(네팔리 회의)와 공산당이 선두에 서서 선거전을 이끌었다. NC가 37.75%의 득표로 110석을 확보하여 집권을 했다. The Communist Party of Nepal-Unified Marxist-Leninist(CPN-UML)는 27.9%의 득표로 69석을 얻었다. 그 다음 당인 통일인민전선은 겨우 4.83%의 표를 획득했다. 1991년 선거 직후 몇 년간의 정치적 형편은 용의치 않았다. 정치적 색깔이 보수측으로 흐르는 사람들때문에 국왕의 인기는 결코 기울어 들지않았다. 다수의 일반 국민들의 기대감은 비현실적으로 높았고 정치의 혼전으로 동요했으며, 높은 물가로 고통을 받았다. 정치적 핍박이 격심했고, 1992년 4월 총파업은 저항세력과 경찰의 가두 폭력으로 변질되었고 그 결과 수 많은 사망자가 생겼다.1994년 말 NC 정권은 중간선거를 제시했다. 결과는 어느 정당도 확실한 위임을 얻지 못했다. 결국은 공산주의자인 CPN-UML이, 과거 panchayat였던 3위의 다수당 RPP(Rastriya Prajatantra Party)와의 연대로 NC의 지원을 받으면서, 승리를 했다. 공산 정권이 국민의 투표로 집권하게 된 것은 세계적으로 아주 드문 시기 중 하나에 속하는 것이다.
CPN-UML은 스스로를 억압된 민중의 승리자로 내세웠지만, 공산당이 입헌 군주가 있는 복수정당의 민주제도에 참여한 것을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을 지 아무런 설명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의 조직은 잘 짜여졌고 민중의 위치에서 지원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정치적 안정은 요원했고, 혼전과 파벌주의만 자자했으며, 공산주의자들이 입지를 확고히 하고 있는 것에 불안해진 NC는 9개월만에 CPN에 대한 지원을 철회했다. NC의 새 정권이, 기회주의적인 RPP의 지원을 얻어, 구성되었다. Sher Bahadur Deuba가 이끄는 NC 정권은 가까스레 유지되고 있다. 1996년 3월 CPN에 의해 개시된 불신임 투표에서 간신히 패배를 면했다. 긍정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민주주의는 다수인에게, 특히 교육을 받은 중산층에게 국가에 대한 새로운 자긍심과 낙관론을 가져다 주었다. 카트만두 정부의 허장하고 숨막히는 관료주의를 대신하는 일신된 유연성과 응답성을 보여주는 예를 들기도 한다. 1992년 11월 정부는 8000명의 공무원을 해고함으로써 다소 의지를 보였다. 어느 정도의 경제 자유화와 인도와의 개선된 관계는 카펫과 의류분야를 포함해 몇몇 걸음마 단계의 산업 활성화에 도움이 되었다. 언론의 자유와 향상된 인권은 민주화로 부터 흘러나온 또 다른 혜택이다. 민주제도가 존재한 적이 없던 곳에서, 전국가적 수준에서 작동하게 제대로 확립한다는 것은 상당히 힘든 과제이다. 가장 큰 문제중 하나는 다수 정치인들의 태도이다. Panchayat 시절동안 너무 오래 정치적 황무지에서 지낸탓에 권력에 발을 들여놓으면 자신의 경제적 안정과 정치생명의 유지가 첫번째 관심사가 되버리는 것이다. 국가와 국민의 관심사는 저 멀리 차위의 문제로 되는 것 같다. 정치적 미숙상태가 지속되는 한, 일 당이 확실한 다수의 지지를 확보할 것 같지가 않다. 정당 내부에선 변화의 의지가 있는 것이 확실하지만, 집권자들이 그렇게 불안정한 위치에 있는 한은 실질적인 변화는 없을 것 같다. 네팔의 허약한 경제, 극빈, 문맹, 그리고 놀라운 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인종적 종교적 국민 분열은 이 과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출 처 : 론니 플랜잇 네팔편(번역 : 송의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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