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이탈 및 이단사
Ⅰ 선교 초기의 이탈 및 이단들
l . 반 교권주의 적인 이탈
1) 최동진 목사의 자유교
1885년 한국에 기독교 복음이 전파 된지 26년 만인 191O년에 복음을 들고 이 땅에 찾아온 미국선교사들의 횡포와 간섭을 배제하고 조선교회의 자치와 독립을 주장하고 나선 사람이 있었으니 전라북도 부안, 태인, 정읍, 임실 등지에서 최중진(崔東珍)목사의 자유교(自由敎) 운동이었다.
그의 조선교회의 자립과 독립, 선교사의 간섭 배제 운동의 열기와 주장에 공감하여 여기 저기에서 그 운동의 여파가 형성되어 갔다. 1911년 평북 의주군 노북교회의 영수 김원유(金元瑜)와 강계의 차학연(車學淵)장로 역시 최중진 목사의 주장과 운동에 공감하여 자유교 운동은 이북까지 파급해 갔다.
2) 이만집 목사의 자치교
뒤이어 1923년에는 대구에서 남성정교희(현 대구제일교회의 전신)의 목사 이만집 (李萬集)은 교권문제로 인하여 미국 선교사와 대립하여 1923년 4월 경북노회에서 치리 (治理)를 당하게 되자 노회를 탈퇴, 자치교(自治敎)를 만들었다. 이만집 목사는 3.1운동당시 경북지방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애국지사였다.
이만집 목사의 조선교회 자치운동의 여파로 전남 장성의 백용기(白容基)목사, 충북 보은의 이병식 조사, 평남 평양의 이규찬(李奎燦)목사, 경기도 고양의 이은우(李恩雨)목사, 서울 북감리교회의 이병재 (李炳載)목사, 황해도의 김재석 목사 등이 이만집 목사의 자치교 운동에 가담하게 될 정도였다.
3) 조선기독교회
1928년 8월 15일 충청북도 중원군 산천면 목계리의 김종태(金鍾台 ), 신상철 (申相哲)등이 감리교 선교부의 간섭을 배제하고 조선예수교회를 창설했다가 1929년 황해노회에서 이단으로 제명 당한 김장호 목사의 조선기독교회와 통합하여 조선기독교회라고 명명했다. 신상철은 강원도 원성군 문막면 비두리 출신으로 1915년경 감리교 목계교회를 세워 주원삼, 김중태 등과 신앙생활을 해오다가 1923년에 김종태 등이 주동이 되어 조선기독교 자치 기성회를 조직하고 1928년 8월 15일에 미국감리교 선교부와 결별하고 독립을 선언한 후 조선예수교회라고 했다. 1929년 3월에는 대구에 있는 이만집의 조선예수교회와 연합하여 제 1회 총회를 대구 남성정교회에서 개최하였고 1931년 1월 15일 황해도 사리원에 있는 조선기독교회와 연합했던 것이다. 신상철이 미감리교선교부 원주교구와 유대를 단절하고 독자적인 노선을 걷기 위해 독립을 선언하였다.
또 1935년 2월 감리교소속 북만지방 감리사인 길촌교회의 현성원 (玄聖元)목사는 변성옥, 한동규, 우인철, 박세평 등과 함께 교권주의를 반대하고 조선교회의 부패를 시정하고 자급자족하는 교회가 될 것을 목표로 조선기독교회를 형성하고 황해노회에서 이단으로 처단된 김장호 목사와 연계 관계를 맺기도 했다.
4) 변남성 목사의 하느님의 교회
1936년에는 성결교 총회 때 서부지방의 변남성 목사 등이 서울의 곽재근목사 등과 더불어 총회장에 당선되자 서북사람들의 진출을 달갑게 여기지 않던 이사회는 새 총회에 대해 불신임을 가결해 버렸다. 그렇게 되자, 그들은 성결교회 기관지인 성화(聖化)의 주간으로 있다가 1936년에‘하나님의 교회'를 창설한 송대용(宋臺用)목사와 합동하니 그 소속교회가 모두 9개였다. 이 때 변남성 목사와 뜻을 같이 했던 정남수(鄭南洙)목사도 그 후 1948년에 대한기독교나사렛교회를 설립하고 송대용 목사는 장로교로 전직(轉職)했고 곽재근, 안형주 목사는 1956년에 웨슬레주의에 입각하여 한양신학교를 창설하기도 했다.
5) 김교신의 무교회주의
김 교신(金敎臣)은 1920년 6월 동경 유학 중 노방 전도를 듣고 예수를 믿게 되었고, 성결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후 우찌무라(內村鑑三) 문하에 들어가 그의 신앙의 영향을 받았다·
1927년 귀국하자 함 석헌, 송 두용, 유 석동, 정 상훈, 양 인생 등과 갈이 <성서 조선(聖書朝鮮)>을 창간하였고, 193O 년부터 주필로서 편집과 발행을 책임지고 여기에 온갖 정성을 다하였다. 또한 성서 연구회를 개최하였고, 1O여 년 동안 매년 일주간의 동계 집회를 인도하였다. 그는 기성교회의 교직이 없었기 때문에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았으나 기성교회의 비난을 받았다.
그는 1942년 <성서 조선> 158호에 실린 권두언 <시와(市蛙)> 때문에 잡지가 폐간 당하고 피검되어 함 석헌 등과 서대문 형무소에서 1년간 옥고를 치루고, 1944년 흥남 질소 회사에서 노무자의 복리에 노력하다가 그의 나이 45세인 1945년 4월 25일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는 무교회 주의로 출발하여 무교회 주의로 끝났으며, 성경연구와 주해에 노력하였고 스스로 <예수를 믿는 한 평신도>로 자처하였다. 또한 무 교회주의 자라고 자처하며 기성 교회를 비방하는 사람들을 책하고 권면 하기도 하였다.
김 교신에게 있어서는 성서와 조선을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었다. 그는 <성서적 신앙 속에서 새 한국의 모습을 구상하려> 하였다. 그는 신앙화 생활에서 성경적 원리를 표준으로 하기에 노력하였고 일본의 창씨 개명을 끝까지 거부하고 <김 교신>으로 살았다. 그의 친교 범위도 몹시 다양하여 도꾜(東京) 대학교 총장이던 야나이와라(失內原忠雄) 등의 일본인들, 전 계은 목사, 이 승훈 장로, 손 양원 목사 등과도 교제하였다.
2. 교리적인 이탈 및 이단
1) 김장호 목사의 자유주의적 해석
1916년 6월 3O일에 황해도 재령 남산현교회에서 회집 된 장로교 제 1O회 황해노회는 홍수원교희 담임 목사인 김장호(金莊鎬)목사의 노회 총대 권을 박탈하고 그의 자유주의 신앙적인 이단행위에 대해 회개하기를 촉구했으나 이에 불복하므로 1918년 12월 6일에 모인 황해노회 제 15회시에 김장호 목사를 이단자로 규정하고 .면직을 하고 노회에서 제명해 버렸다. 이때 노회 명령을 받은 장홍범목사가 홍수원교회에 가서 노회의 결정을 저녁예배시간에 회중에게 통고하자 김장호목사의 둘째형인 김재호가 등단하여 장 목사를 구타했다. 그러나 장 목사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무수히 맞았다. 장 목사를 구타한 김재호는 그 날밤 집에 돌아갔다가 심장마비로 즉사한 놀라운 사건이 터졌다. 한국교회사상 최초로 이단으로 규정된 김장호 목사는 어떤 인물인가?
그는 1914년 평양신학교 7회 졸업생으로 황해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노회 부서기와 서기 등 임원직을 맡은바 있다. 그는 목사안수를 받기 전인 1902년부터 황해도 홍수원교회를 맡고 있었으나 1916년에 황해노회에서 그의 총대권이 박탈 당하자 1918년 7월 7일 황해도 봉산군 신수면 신원교회를 거점으로 조선기독교회를 창설했다. 그러면 김장호 목사가 제명 당하고 공위량 선교사가 추방되기까지 했던 한국 최초의 이단 설의 내용은 어떤 것인가? 첫째, 자유교회적 교회론을 주장한 것이다. 의회적인 정체에 불복하고 평민적 민주정체를 주장했다. 이렇듯이 그의 통일성과 입체적인 결속력을 무시하는 교회론은 일제의 입장에서는 훨씬 다루기 쉬웠고 따라서 총독부가 분파적 효력의 구현을 위해 이를 후원해 주게 되었던 교회론이었다. 둘째, 성서의 자유주의적인 해석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여 홍해를 건널 때는 바닷물이 다 빠진 때였고 애굽군대가 바다에 침몰하여 죽은 것은 물이 밀어 만조가 되었을 때라고 하여 하나님의 전지전능성과 선민의 구원섭리를 부인했던 것이다. 또 예수께서 디베랴 바닷가에서 베푸신 오병이어의 이적은 초자연적인 이적이 아니라 그때 모였던 군중들에게 섞여있던 어린아이가 가지고 있던 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를 예수 앞에 내놓자 이에 감동을 받은 어른들도 제각기 가지고 있던 떡과 고기를 내놓아 많은 사람들이 먹고 남은 것이라 해석하여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이적을 부인하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과학적인 사고방식에 입각하여 해석했던 것이다. 예수께서 갈릴리 바다에서 물위로 걸으신 것은, 사실은 바닷가를 걸었는데 파도에 비친 영상이 물위를 걷는 것처럼 보였다고 해석했다. 이후 오늘 일부 자유주의 신학자들과 교직자들의 성서 해석 방법과 극히 흡사한 것을 볼 수 있다.
2) 최태용의 복음교회와 유일회성 부인
오늘날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희(N C C) 회원교단으로 타 교단과 이해를 나란히 하고 있는 복음교회도 1930년대에는 이단 시비에 휘말리기도 했다. 한국적 기독교에의 지향과 고전주의로 말미암아 부패하고 타락한 한국교회를 쇄신하고저 1925년 6월에 복음교회가 태동되어 1935년 12월 22일에 공식으로 창설되었다.
일본의 무교회 주의자인 우찌무라간죠(內村藍三)의 영향은 받은 최태용(崔泰用)과 그에 동조하는 백남용은 외국 선교사들의 횡포에 반발하여 주체성 있는 민족교회 형성과 신비주의적인 체험을 내세우고 각 교단들로부터 이탈된 교직자들과 함께 복음교회의 출발을 보았던 것이다. 복음교회가 출발할 당시의 최태용은 신약성서의 유일회성적인 계시를 부인하며‘현재의 기독교에 예수그리스도가 다 나타나신 것이 아니다. 아직 그의 중대한 부분이 남아 있다. 공관복음과 바울서 간에 다 하지 못한 예수그리스도가 있다’는 것이다. 최태용은 미국 선교사의 우월성과 인종차별주의에 대해 그들이 한국교회를 어린아이나 걸인과 같이 취급했다고 반발했다 뿐만 아니라 기성교회의 교권주의에 대해서도 거부감을 가졌다. 1935년경부터 최태용은 무교회주의적인 입장을 탈피하고 그리스도의 순육론(純肉論)과 영적 기독교에의 지향을 표방하고 복음교회를 일으켰던 것이다. 그러나 후일 지동식 박사등 대학자에 의해 초기의 물의를 빚었던 교리는 수정에 수정을 가하여 지금은 N C C 가맹 교단으로 활동하고 있다.
3. 신비주의적인 이탈 및 이단
한국교회 주변에 신비주의 바람이 회오리치기는 1930년대였다고 볼 수 있다. 당시 한국교회의 상황은 암담하기 그지없었다. 일본제국주의의 가중되는 탄압정책에 경제적인 공황까지 겹치고 나라 잃은 슬픔 속에 빠져 좌절과 실의를 딛고 일어설 수 없을 만큼 절망적이었다. 사람들은 현실에서 도피하여 피안의 세계 속에 안주하기를 갈구했고 이 세상에 더 이상 바랄게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대두된 것이 기독교 이름으로 나타난 신비주의 운동이었다.
1) 이용도 목사의 예수교회와 원산 신비주의자들
신비주의 운동의 선두주자는 감리교회의 이용도(李龍道)목사였다. 그는 예수님처럼 비록 서른 세 해의 짧은 생애를 살고 갔지만 그는 십자가상에서 고난받으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고저 노력했고 전국방방곡곡을 누비면서 초교과적으로 열띤 부흥회를 주도해 나갔다. 그의 나이 25세 되던 해 폐결핵으로 각혈까지 할 정도로 중환자의 모습으로 고향인 강동으로 귀향하다가 어느 작은 교회에서 설교 중에 뜨거운 성령의 체험을 맛보았다. 1932년 11월 28일 평양노회는 이용도목사와 황국주의 사경회 강사 초청을 금하고 교인들이 집회에 참석치 말도록 결의하고 뒤이어 안주노회는 1933년 2월 이용도를 이단으로 단죄하자 이용도목사는 그해 3월 감리교연회에 사직원을 냈다. 그리하여 예수의 공생애처럼 이용도목사는 33년의 짧은 생애에 종지부를 찍고 1933년 1O월 2일 원산 신학산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1932년 1월 28일. 함남 원산의 한준명 목사가 여신도인 이유신(李維信)과 함께 당시 원산감리교회 여신도였던 유명화(劉明花)를 데리고 평양에 가서 30일간 입신 강신극(入神降神劇)을 연출하여 물의를 빚었고 그해 가을에는 평소 이용도목사와 교분이 있던 이호빈(李浩彬)목사와 백남주(白南柱)목사가 이용도목사에게 원산 감리교회 여신도였던 유명화를 소개한 일이 있었다. 이때 유명화는 예수 가라사대로 시작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빙자, ‘ 용도야, 너는 내 교회를 세워라. 이놈, 네가 교회를 분립치 않으면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무엇이냐? ’고 하자 이용도목사가 이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알고 굴복했다고 한다.
유명화는 자기에게 예수가 임재 하였다고 하면서 예수처럼 모습을 꾸미고 영흥 집회 때는 강신극을 연출했다고 한다.
그 후 간도에 있던 한준명 목사가 유명화의 강신극에 말려들었고, 1932년 11월 평양에서 가진 집회에서 유명화는 하나님의 계시를 빙자,‘ 한준명은 다음해 6월 9일 모 여인과 결혼하여 270일되는 34년 3월에 대낮을 차지할 대성자 광진〔光振)을 나을 것이요, 박승걸(朴承傑) 장로는 모 여인과 결혼하여 석양을 차지할 대성자 광재(光在)를 낳으리라’고 예언했다는 것이다.
접신녀라고 보는 이유신(李維信)은 처녀 때 귀신이 들려 고생을 하다가 부홍회에 참석하여 신유의 은사를 받고 예수를 믿은 후 열광주의적인 신앙을 갖고 신비적인 경향으로 흘렀다.
유명화는 박승환 장로의 부인으로 불신가정에서 태어나 열심히 믿다보니까 지나친 신비주의자가 되었다. 이용도목사가 유명화에게‘주여… ’라고 한 것은 유명화를‘주님'으로 믿는데서 나온 말이 아니고 유명화의 목소리에 주님의 교훈이 담겨져 있기에‘주여 ’라고 했다고 하면서 유명화는 결코 주님 자신은 아니라고 이호빈 목사에게 변명 겸 실토를 했다고 한다.
1932년 11월 평양노회에서 한준명 외 유명화, 이유신 등과의 강신극에 대해 논란한 끝에 이단으로 단죄하자 이용도가 한준명의 처지를 동정하고 감싼데서 이용도도 같이 멍에를 메고 몰락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단죄 당한 이용도목사는 설 땅이 없었고 설상가상으로 13명의 이용도 추종자들도 출교를 당해버리는 판국에 들어서자 어쩔 수 없이 교단을 형성하게 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1933년 6월 3일. 이용도는 새 교단의 창립을 극구 반대하고 괴로워했으나, 한준명, 백남주, 이호빈, 이종현 등 여러 사람은 예수교회의 창설을 준비하고 조선총독부에 이용도의 이름으로 포교(布敎)계를 제출케 하였다.
2) 백남주, 김성도의 성주교회
또 원산에서 신학산이란 신학교를 경영하던 백남주 목사는‘새 생명의 길 ’이란 저서도 낸 인물인데 예수교회가 출범할 신전 (信典) 헌법 등을 초안하여 조직을 마친 후 추종여신도였던 김정일( 金貞一)과 동거, 스캔들로 물의를 빚자 철산에서 신비주의운동을 펴던 김성도(金成道)여인과 함께 1935년 봄에 평북 철산에서 성주교회 (聖主敎會)를 세웠던 것이다. 김성도 여인은 3백석꾼의 부자였고 창고에 멍석을 깔고 항상 병자들과 함께 하며 그냥 먹이고 입혔고 얼마나 많이 기도를 했는지 무릎과 팔꿈치에 굳은살이 붙을 정도였다. 그녀는 등창이 난 환자나 거지를 손수 씻기고 입으로 고름을 빨아내고 병을 고쳐주곤 하였다. 그녀가 ‘새 주,’‘새 주님 ’으로 불리우게 된 동기가 있다. 신도들이 그녀를 보고 주님을 뵙는 듯 반갑다고 해서 ‘새 주’라고 불러서 만류했으나 듣지 않고 계속 ‘새 주님 ’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게다가 김성도 여인의 남편 정씨도 그녀가 예수를 믿는다고 구박하고 심하게 매질을 했는데도 부인의 사랑과 신앙에 감동하여 예수를 믿다가 임종시에 그 아들들을 모아 놓고 ‘네 어머니가 바로 주님이시니라’고 한데서 발단이 된 것이다. 성주교회는 일명 새 주교회로도 호칭되었다. 사가들은 김성도 여인의 열두 제자를 두고 기도 끝에는 ‘새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평남 진천 (津川)에서 성주교회 총회가 열렸을 때 모인 자 49명에게 목사안수를 주었고 그날 밤 혼음의 의혹과 가능성이 있는 남녀혼숙의 숙소배치를 하여 이호빈은 백남주와 단교 선언을 했다고 한다.
3) 황국주와 피가름
‘목가름,‘피가름’의 원조로 불리우고 있는 황국주(黃國周)는 냉면업을 하는 황해도 장로의 외아들로 태어나 공부도 잘하고 똑똑했는데 신학을 한 적도 없고 대학을 다닌 것도 아닌데 100일기도를 끝내고 수염을 기르고 예수처럼 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새 예루살렘도성을 찾아 순례의 길을 정처 없이 떠돌아다닌 다고 하던 사람이었다. 그는 만주에서 서울을 향해 순례의 길을 계속하면서‘ 자신의 목이 잘리우고 그 자리에 예수의 목이 붙었다’고 하면서 ‘머리도 예수의 머리, 피도 예수의 피, 마음도 예수의 마음으로서 전부 예수로 변했다’고 자처하자, 사람들은‘현대판 예수’를 구경하고자 모여들었고 그 중에는 가정을 버리고 그를 따르는 처녀와 유부녀들이 수두룩하였고 때로는 6O여명이 넘을 때도 있었다. 1935년 7월경 함경남도 삼호교회 부근에 와서 보니 남녀가 60~7O명이 되었는데 함께 숙식을 하면서 난잡하게 누워 쉬고 자기도 하였으며 자신을 그리스도라고 자처하는 황국주는 죄를 범할 수 없는 완전주의자를 표방하였다.결국 그도 이미 안주노회에서 이단으로 단죄되었고 서울에 도착한 후 삼각산에 기도원을 세우고‘목가름'‘피가름’등의 영체 교환 교리를 가르쳤으니 이것은 일종의 혼음의식이었던 것이다.
4. 문선명이 관련 맺었던 이단들
본명을 용명(龍明)이라고 한 문선명은 이미 해방을 전후하여 이북지방에서 일어난 신비주의적인 이단운동에 몸담았고 후일 문교주의 수제자가 된 여인네들도 모두 그 일파였던 것이다. 해방 전 이북에는 몇 종류의 신비주의적인 이단운동이 있었는데 그 하나가 철산의 김성도 여인을 중심으로 한 성주교회 일명 새 주파였고, 다음이 평북 선천의 허허빈 여인을 중심으로 일어난 소위 복중교희 (腹中敎會)였다.
1) 허허빈의 복중교회와의 관계
허여인은 예수가 재림할 때 도적같이 임한다 하면서 나이도 1세에서 33세 사이의 사람으로 온다고 하면서 항상 재림주가 왔다하면 입힐 재림주의 옷올 준비해 놓고 더운 밥을 차려놓고 기다리기도 했다고 한다. 그 차려놓은 밥이 식으면 방문객에게 대접했다고 한다. 이 소식을 듣고 문선명은 자신을 추종하던 추종신도 차상순(車相淳), 김원필(金元弼) 등을 보내어 그녀에게 기도를 받아보면 자신이 오실 재림 주라고 할 것이라고 하였으나 그녀가 기도해 보더니 문선명은 재림주가 아니라고 하여 문선명은 실망했다고 한다. 허여인의 제자 중에는 문교주의 두 번째 처이며 현처 (現妻)인 한학자 여인의 모친 홍순애(洪淳愛)도 끼어 있었다. 허여인의 예수재림 준비 집단은 194O년대를 전후하여 일어나‘예수께서 불우한 환경 가운데서 태어나 평생을 고초와 박대 속에서 하늘의 큰 뜻을 못 이루고 억울하게 십자가의 수난을 받아 한 많은 생애를 마친 예수의 한〔恨)을 풀어드리고 다시 오실 주님에게 초림 주의 전철을 밟지 않도록 미리 재림 주 맞을 채비를 해야된다’고 주장하는 열광주의적인 집단이었다. 허여인을 중심으로 약 3OO여명의 교인들이 재산을 다 털어서 바쳤고 또 예수께서 태어날 때부터 성장할 때까지 입을 수 있는 한복과 양복을 각각 한 벌씩 준비하고 생활필수품 일체와 그리고 완전히 성장한 재림 주께 드릴 의복 한 벌씩을 정성껏 마련해 놓고 재림 주 맞을 준비를 해놓고 기다렸다. 이 집단에 대해 해방 후에 일제 검거선풍이 일었다.
2) 황국주파와의 관계
또 문선명과 직접 관련된 이단 중 하나는 황국주파였다. 황국주의 제자 중에는 후일 문선명의 수제자가 된 옥세현(玉世賢)와 지승도(池承道), 박월영 (朴月影)이 있으며 함께 혈통 복귀를 한 정득은(丁得恩) 등이 있었다.
황국주의 직접 제자는 아니지만 영향을 받은 자 중에는 원산에서 신학산이란 신학교와 이스라엘수도원을 경영하던 백남주 목사도 있었고, 청진의 김남조 노파도 문선명과 관계를 맺었던 인물들이다.
3) 김백문과의 관계
한편 무신론자였던 김백문(金百文)은 경상북도 칠곡 사람으로서 대구의학 전문학교 4학년 때 여름 방학중에 수련의 실습 차 함경북도 청진도립병원에 갔다가 김남조 노파를 알게 되어 은혜를 받은 후 학교마저 중퇴해 버리고 신비주의운동을 하게 되었다. 김남조 여인의 소개로 김백문은 원산 이스라엘수도원장 백남주를 만나 그의 제자가 되었다. 1946년 3월2일 오전11시 2O분부터 12시 사이에 예수가 친히 나타나서 김 백문에게 사명을 주었다고 한다.
김백문은 경기도 파주군 임진면 섭절리에 이스라엘수도원을 차려놓고 서울 상도동에는 지 교회까지 했으니 그 시기는 1944년부터 1946년까지 3년간이었다. 이 때 상도동 지 교희 책임자는 방호동(方好童)이란 사람이었다.
김백문은‘기독교 근본원리 ’‘성신신학'‘신앙 인격론’ 등을 내는 등 활발한 움직임이 있었는데 그를 보좌하던 박상래 (전 연세대교수)씨가 이탈한 후부터는 와병 중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영등포 신길동에 살면서 백수건달 생활을 하고 있던 문선명을 위해 본처 최선길의 모친이 신접살림까지 차려주었는데, 이때 문선명은 김 백문의 상도동 지 교회를 드나들면서 그의 주장과 교리에 심취했고 심지어는 문선명이 그의 처였던 최선길에게 권하여 김백문으로부터 혈통복귀 의식을 받으라고 했으나 김백문이 최선길이 보통 여자가 아닌 것 같고 자칫하면 문제가 될 것 같아 복귀의식을 하지 않고 보냈다고 한다.
4) 정득은과의 관계
황국주파의 옥세현 노파와 같은 신령운동파였던 정득은은 해방직후 월남하여 서울역 부근 동자동에서 집회를 하면서 삼각산에 대성심기도원을 차렸었다.
문선명은 김백문과 접촉하면서도 삼각산에 있는 대성심기도원에서 방호동 등과 함께 약 4O일간 수련을 하면서 정득은 여인을 통해 혈통복귀 의식을 받고 아담 격으로 하와 격인 정득은과 더불어 모자협조(母子協助)의 기준을 갖추었다고 한다.
Ⅱ 해방 전후의 이단들
1. 외국에서 들어온 외제이단(外製異端)
1) 여호와의 증인
1912년에 미국의 워취타워 성서책자협회 (여호와의 증인 ) 의 선교사인 ‘ 알·알·홀리스터 ’부부가 내한하여 문서선교를 시작함으로써 이 땅에 이단의 활동이 그 출발을 보았다. 원래 여호와의 증인은 1872년에 럿셀이란 사람이 안식교 지도자였던 ‘ J ·H ·페난트’의 책을 읽고 영향을 받아 1884년에 미국 펜실베니아주에서 시온의 파수대 지도자 협회란 조직을 갖추었다.
홀리스터 부부는 1914년 3월까지 머물러 있으면서 여호와의 증인 교리를 전하고 문서를 배포하는 일을 하다가 귀국하자 1915년에 맥켄리선교사 부부가 내한하여 본격적인 선교활동을 했다. 1914년에는 한국 성경연구원을 개설하고 ‘시대에 관한 하나님의 경륜’ 을 한글로 번역, 출판하기도 했다. 또 만국성서 연구원의 명의로 경성우체국 사서함 21호를 개설했다. 1929 년에는 인쇄공장을 설립하고 일본어, 중국어 책까지 인쇄하였고, 1933년 여호와 증인의 교리문제로 인해 조선총독부에서 서적출판 금지령을 받았고, 1939년에는 궁성요배 신사참배 거부로 인하여 전 여호와의 증인들이 구속되었다. 1949년에 한국에 정식으로 선교부를 설치하고 도날드·엘 ·스틸(Donau, L, S, teele) 부부가 내한하였고, 1957년에 사단법인 워치타워 성서책자협회를 설립했다.
2) 안식교
여호와의 증인과 같은 시기에 제 7일 안식일 예수재림교( 안식교)가 한국에 들어왔다. 월리암 밀러가 구약 다니엘 9:24~27에 근거하여 예수재림의 날을 예언하고 히람 에드슨이 1844년 1O월 22일에 예수께서 지성소에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고 하며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키도록 주장하고 엘렌 ·지 ·화이트 여인이 1860년 제7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라는 명칭을 채택하여 그 출범을 보았고, 1864년 5월에 제7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 세계총회를 개최한 안식교는 1904년 하와이 이민이었던 유은현, 손홍조 두 사람이 일본 고베에서 일본인 안식교 국곡수(國谷秀)로부터 침례를 받고 한국인으로서는 최초의 안식교인이 되었고, 1919년 5월 조선회합 제1회 총회가 개최되었다. 1941년 2월 일제의 기독교 탄압정책으로 인하여 안식교 선교사들은 본국으로 추방되고, 월간 시조, 교회지남 등이 폐간 되었다. 1943년 6월 교단 지도자들이 투옥되고 최태현 (崔泰鉉)목사가 순교를 당했다.
해방이 되고 그 해 1O월 18일 안식교는 재건되고 합동총회가 개최되었고 안식교는 비록 교리적으로는 정통 기독교와 다른 이단이지만 그들은 교육기관을 설립하고 병원을 세우고 구호사업을 전개하고 금주 금연 운동에 앞장서는 등 사회에 기여하는 기능적인 면도 많지만 근본적으로 기성교회와 멍에를 같이 멜 수 없는 것은 교리적인 차이 때문이다.
이 안식교로부터 떨어져 나간 안상흥(安商洪)이란 사람이 1964년 4월 28일에 하나님의 교회 예수 증인회라는 교단을 만들어 본부를 부산시 동래구 우일동 808 번지에 두었다가 1985년 6월 2일 서울 동대문구 답십리 5동 498-7에 본부를 옮기고 하나님의 교회 안상홍 증인회로 명칭을 바꿨다.
안식교 절기 파라고 부르는 이들은 토요 안식일을 지키며 구약시대의 절기와 율법을 지키며 교주 안상홍을 보혜사 성령이라고 한다. 그러나 안상홍은 1985년 2월25일에 사망하고 말았다. 그렇지만 1988년에 이 세상은 멸망이 되고 늦은 비 성령을 통해 14만 4천의 택한 백성만 휴거하여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3) 몰몬교
보통‘ 몰몬교 ’로 통하는 말일 성도 예수그리스도의 교회는 1820년 열세살 짜리 소년 요셉 스미스가 계시를 받고 1830년 4월 6일 뉴욕에서 몰몬교를 창설 하였다. 그러나 1844년 요셉 스미스가 피살당한 후 제2세 교주인 부리감 영이 신도들을 이끌고 서부로 이동하여 유타주 솔트레이크( Salt Lake)에 정착하여 몰몬교 촌을 만들었다. 이 몰몬교가 한국에 이입된 것은 1951년 김호식 (金浩植)박사가 미국 유학 중에 몰몬교에서 침례를 받고 귀국 후에 부산에서 미군들과 함께 집회를 가졌다. 1956년 몰몬교 선교사인 리차드 리데튼 장로와 단지·파워 장로가 최초로 파견되었고, 1962년에 한국선교부가 발족되었고, 1973년 3월에 서울 교구가 개설되었다. 이들은 몰몬경을 경전으로 믿으며 요셉 스미스가 발표한 13개 신앙신조를 신앙하고 있다. 이 몰몬교에 반기를 들고 1860년 4월 요셉스미스의 장남인 신 영 스미스를 교주로 하고 복원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Reorganized Church of Jesus Christ Latter Day Saints)가 창설되었다.
1958년 미국 군인 웬 햄 (When Ham )에 의하여 한국에 들어왔고 1961년 굳드리티 ·월리엄 선교사가 내한하여 정식으로 복원 예수그리스도의 교회 한국 선교부가 창립되고 재단법인으로 발족했다. 이들은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것으로 천국 건설의 시온주의를 목적하고 있다.
4) 참예수교회
중국에서 발생하여 일본을 거쳐 한국에 이입된 참예수교회가 있다. 1917년 미국 갤리포니아주 로스엔젤레스에 거주하던 중국인 화교 위 바울과 장 바나바가 흑인으로부터 전도를 받고 대만에 돌아가 참예수교(眞野蘇敎)를 창설했다.
1947년 일본에서 살던 참예수교인 배상룡(裵相龍)과 정태준(鄭泰俊)이 귀국하여 경북 김천에서 한국 최초로 참예수교회를 설립하고 1973년 5월 총회 본부를 은평구 녹번동 53~99에 두었다. 이들은 토요 안식일을 지키고 전신 침례와 발을 씻어주는 세족례(洗足禮)가 있으며 성령 받은 증거로는 영언(靈言) 즉, 방언을 해야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2. 국내에서 발생한 국산이단(國産異端)
1) 문선명의 통일교
통일교는 1954년 5월 1일 교주 문선명에 의해 세계 기독교 통일 신령협회란 이름으로 서울 성동구 북학동 391번지에서 정식으로 간판을 걸었다. 통일교의 출범은 이미 그 전후에 숱한 사회적 물의와 말썽을 빚었으며 그 시원은 더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문교주는 1946년 초부터 약6개월간 경기도 파주군 임진면 섭절리에 있는 김백문의 이스라엘 수도원에서 박태선 등과 더불어 원리 교육을 받은 바 있어 엄밀하게 말하자면 김백문의 제자라고 할 수 있다. 김백문은 서울 성북구 정릉3동 산1번지에서 청수교회라고 하는 초 교파적인 교단을 갖고 있었다.
문선명은 1936년 4월17일 부활절 아침에 예수가 자기에게 나타나 사명을 맡겨 주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 그때 문교주는 예수님의 “인류 구원사업의 소명이요 공식하명(公式下命〕”을 몇 번이나 사양하다가 예수께서 “그대가 아니고는 이 중대한 책임을 감당할 사람이 없다”고 거듭 당부하여 할 수없이 큰 사명을 맡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문교주는 이북에서부터 각종 신비주의 운동에 가담하여 본인 나름대로 신비체험을 하는데 열중하다가 급기야는 해방 후 1946년 3월 평양에 가서 육교리에 있는 김종화 여인의 집 부엌 뒷방에서 광야교회라는 간판 없는 교회를 시작했으니 이때 지승도 노파가 이에 합세했고 그후 김원필(金元弼), 김인주(金仁柱)노파, 차상순(車相淳)등이 잇따라 입교했다. 이때 문교주는 2O여명의 신도를 데리고 방언을 하고 몽시를 받는다고 떠들썩하게 광란집회를 했다. 이들은 박수를 치면서 템포 삐른 찬송가를 반복해서 불렀고 밤낮으로 소리 높여 울면서 기도를 하여 ‘우는 교회 ’로 이웃의 지탄을 받기도 했다. 더구나 문교주의 집회에 참석한 여신도들이 가정을 등지고 미혹되어 교회에서 가정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하는 사례가 일어나면서 물의를 빚기 시작했다. 문교주는 1946년 8월 2일 사회혼란 혐의로 평양 대동 보안서에 구속되었다가 그 해 11월 21일 풀려났다. 1947년 초 문교주는 평양 경창리에 있던 신도 정달옥(鄭達玉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1948년 2월 22일 오전 1O시, 문교주는 이남에다가 부인 최선길과 아들 성진을 두고 유부녀인 김종화 여인과 ‘어린양 혼인잔치 ’를 올려 김 여인의 남편이 고소하여 다시 투옥돼 재판을 받고 약1개월간 평양형무소에 갇혀 있다가 5월 2O일 함경남도 홍남 형무소에 이감됐다. 여기서 복역하다가 유엔군의 북진으로 풀려나 월남하여 1951년 1월 27일 부산에 도착하여 부두 노동자 생활을 했다.
이때 부산 범넷골 뒷산에 있는 바위에 올라가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했다고 하여 통일교에서는‘눈물의 바위 ’라고 하며 이곳을‘성지’로 지정했다고 한다.
부산에서 추종자들을 모아 집회를 갖기 시작했고 이때 기성교인으로서 맨 처음 입교한 사람은 당시 신학교 2학년생이었던 강현실(姜賢實) 전도사였으니 때가 1952년 5월1O일의 일이었다.
1953년 7월 문교주의 전위병이 된 강현실은 경북 대구에 올라가 통일교 교리를 선전했고 대구에서 물의가 일어나자 다시 북상하여‘현대판 메시아’문선명은 서울 입성 (入城)을 단행한 것이다. 서울에 올라 와서 당시 종교연구에 심취해 있던 이창환(李昌煥)을 만나 그의 의견에 따라 세계 기독교 통일 신령협회란 간판을 걸고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으니 그때가 1954년 5월 1일의 일이었다.
이때 문교주는 다만 ‘선생님 ’으로만 불리워졌고 협회장은 이창환이 맡았다가 3개월만에 의견 대립으로 이창환은 문교주와 결별했다. 이것이 문교주가 통일교를 시작한 경위라고 할 수 있다.
한때 통일교에 몸을 담았다가 이탈한 변찬린(사망)은 성경의 원리 ’(상·중·하)를 내어 이단적인 교리로 물의를 이르켰다. 역시 통일교 이탈자 김건남(金健南)은 1972년도에 월간 성별 6월호와 7월호에 통일교의 내막을 공개하는 폭로물을 연재하다가 통일교로부터 폭행과 위협을 당한 후 연재가 중단됐다. 그후 성동구 성수동 노름산 시장에서 생수교회를 하던 김건남은 '신탄’이란 책을 내고, 경기도 안양시 비산2동 238-13 신천지 안양교회에서 계시록 강해를 맡고 있다.
2) 정명석의 애천교
통일교에서 승공 강사 생활을 했던 ‘정명석 ’은 서울 종로구 구기동 125-1번지에 예수교 대한 감리회 애천교회란 간판을 걸고 주로 대학생들을 상대로 한국대학생 애천 선교회란 간판을 걸고 캠퍼스에서 활동하다가, 비교신학연구회로 명칭을 바꾸어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들은 정명석을 JMS라고 하여 J(Jesus Christ ), M(Messiah ), S (Savaiour)로 해석, 오실 메시아로 믿고 있으며 1999년 7월 14일 교주 정명석이 인류를 심판한다고 예언했다.
이들은 3O개론 성경공부를 통해서 학생 신도들을 포섭하고 있으며 공부가 끝나면 JMS회원증을 발급한다
많은 젊은 여자들과 문란한 관계를 맺은 사실이 알려져 사회의 지탄을 받았다.
3) 박태선의 전도관
박태선은 남대문교회 집사로서 삼각산 기도원 등 열광주의 집회에 전전하면서 신비체험을 하다가 교적을 창동교회(김치선 목사 시무)로 옮겨 장로가 되었다.
1954년을 전후하여 경향 각지에서 집회를 인도하던 박태선은 1955년 1월 1일부터 7일까지 서울 무학교회 부흥집회의 인도를 필두로 서울 남산집회, 대구, 부산, 한강 백사장집회를 인도하면서 서서히 불의 사자로 알려지게 되었던 것이다.
1955년 3월 26일부터 4월 5일까지 있었던 남산 천막집회를 하면서 그는 기성교회를 신랄하게 비판하며 마귀새끼들이라고 몰아세워 물의를 일으키고, 이때 나온 헌금과 금반지 등의 처리로 시험이 있으면서 탈선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결국 1955년 7월 한국 기독교 연합회(NCC)에서 성명서를 발표하고 그의 이단성과 교리적인 탈선을 규탄했으며, 1956년 대한 예수교 장로회 경기노회가 이단으로 규정하였다.
박태선 전도관은 한국교계에 가장 사회적 물의를 많이 빚었던 이단으로서 1980 년부터는 예수는 99% 죄인이고 성경은 98% 가짜이며 박태선 자신이 5798세 짜리 새 하나님이라 하여 아예 간판도 천부교(天父敎)로 내걸고 있을 정도로 이제 예수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비기독교적 이단의 집단이 돼 버렸다. 한국동란이 끝난 직후 사회적인 혼란의 와중에서 신앙촌 운동 천년왕국 운동을 벌여 소사, 덕소, 기장 등지에 제 1,. 제2, 제3 신앙촌을 세우고 한때 수십만 신도를 끌어 모았던 박태선의 전도관 운동은 이제 완전히 사양길에 접어들어 몰락하고 있다. 박태선은 감람나무, 말세 마지막 종, 동방의 의인, 이긴 자, 두 증인, 굵은 가지, 철장 권세를 가진 자 등 갖가지 신격화된 대명사로 지칭되다가 1980년대에 접어 들어 아예‘ 이 땅에 오신 새 하나님 ’으로 돼 버렸다.
4) 전도관에서 이탈한 이단들
박태선의 전도관에서 이탈한 사람들이 만든 박태선계 이단이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
▶ 유재열의 장막성전은 현재는‘대한예수교장로회 이삭교회 ’라는 명칭을 쓰지만 경기도 시흥군 막계리 (현 남서울대공원)에 자리 잡고 있었다. 1969년 1O월 초하루께 ‘한때 두때 반때의 역사’가 일어난다고 예언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가 집단생활을 이루었다. 당시 용산 시외버스 터미날은 일요일이면 온통 장막성전에 가는 신도들로 초만원을 이루기도 하였었다.
▶ 자신이 ‘재림예수’라고 자처하여 나타난 구인회는 원래 전도관 출신으로 과천에 있던 장막성전에 다니다가 1973년도에 새마을 전도회를 창설하고 스스로 교주가 되었다. 그러나 1979년 2월 29일 사망해 버리자 교주의 뒤를 이어 최총일이란 자가 재림예수의 제자인‘선지자’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 박태선 교주의 산하에서 전도사 노릇을 하던 조희성은‘영생교 하나님성희 ’를 창설했다. 그는 박태선은 감람나무 원둥치 이고 자신이 그 가지이므로 열매는 등치에서 맺지 않고 가지에서 맺는 법이라고 하면서 자기를 믿고 따라야만 영생한다는 뜻에서 영생교라는 명칭을 붙혔다. 신도들은 그를 가르켜 ‘주님 ’이라고 부르고 최근 단군신전 문제를 놓고 물의가 일어났으나 아랑곳하지 않고 ‘국조 단군숭봉희 ’를 만들고 그 행사에 돈을 쏟아 넣었다. 또 무궁화심기 운동도 전개하면서 자선들의 이단성을 은폐하고 있다.
이만희 박인선의 신천지 안양교회,
▶ 김풍일의 한국예수교 실로성전〔대한예수교장로회 실로등대 중앙교회),은 교주를 보혜사 성령이라고 하였으며, 구로공단 입구에서 강서구 화곡동으로 옮겼다가 1983년에 관악구 봉천 7동으로 자리를 옮기고 교명도 대한예수교장로회 실로등대 중앙교회로 바꿔 버려, 장로교 간판 때문에 사람들로 하여금 혼란을 빚게 하고있다.
▶ 박태선을 따라 다니면서 북을 치곤 하던 노광공은 동방교를 만들어 갖은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다가 1967년 7월26일 교주가 죽자 그의 아들 노영구가 맡아서 이끌어 갔으나 역시 여신도 간음, 일가족 집단자살, 거액 허위도난 신고사건 등 각종 물의를 빚다가 문공부로부터 재단 법인 등록 취소를 당하고 지하로 잠적했으나 지금은 그리스도선교회란 명칭으로 ‘주간기독교’를 계속 발행하고 있다.
▶ 전도관에서 떨어져 나와 서울 성동구 왕십리에 한국중앙교회 (세계기독교복음선교회 )를 세우고 유명 메이커 제품을 팔아준다고 사기행각을 벌리다가 교주 김순린등 일당이 구속되기도 했다.
▶ 한국기독교 에덴성회는 박태선계에서 가장 활발한 단체로서 박태선의 비리를 잘 아는 교주 이영수는 또 다른‘감람나무’임을 내세워 교세를 확장해가고 있는데 주로 박태선 신앙촌에서 떨어져 나온 사람들이 그리로 몰려들곤 하여 박태선을 위협하는 적수가 되고 있다.
박태선의 계통을 이어 발생한 종파가 자그만치 2O여개 파에 이르러 그들은 대부분이 박태선과 유사한 스타일로 교세를 이끌어 가고 있다.
이외 천옥찬의 대한기독교천도관, 김종규의 호생기도원, 최의구의 에덴성회, 백만봉의 재창조교회, 최규원의 천사마귀교, 장영실의 백마십자군, 계정열의 산성기도원, 등 2O여개 파의 이단을 파생 시켰으니 박태선 이야말로 한국 기독교이단의 대부라고 할 수 있다.
5) 이유성의 새일교
계룡산에서 말세 마지막 종으로서 역사를 하고 한국교회 부홍사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이유성 (일명 이뢰자)의 새일 수도원은 1960년과 7O년대 교주가 죽기까지 전국적으로 가장 강력한 신비주의 집단으로서 직접 계승을 주장하거나 그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이유성의 교리를 그대로 답습하거나 인용하여 자기 나름대로 요한계시록을 풀이, 교인들을 미혹하고 있다.
새일 파의 분파는 1971년 8월15일 교주 이유성 사망 후 7-8개 파로 나뉘어졌는데, 그중 수원 북문근처에 있는 스룹바벨파 (교주 김인선)가 가장 강력하다. 이들은 침례교단에 침투하여 용산구 원효로에 있는 모 침례교회를 비롯하여 2O여개 교회가 외형상 침례교단에서 활동하면서 내적으로는 김인선을 말세 마지막 사명을 받은 여종으로 믿고 토요일마다 수원에 모여 집회를 갖기도 하는데, 1985년 겨울 경기도 안성에서 그 광신도 4명이 산 기도를 하다가 불에 타 숨진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예장 호헌총회 부총회장을 맡은 김화복 목사도 새일수도원에서 새 이름을 받아 원래 이름인 김오식에서 김화복으로 이름을 바꾸고 이유성의 말세론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6) 권신찬의 구원파
‘워치만니 ’의 사상적 영향을 받고 출발한 세칭 구원파는 세 갈래로 분파 되었다. 권신찬과 그의 사위 유병언이 이끌고 있는 기독교 복음 침례회는 지방 곳곳에 교회를 세우고 최근에는 한국기독교멸공협의회 박병훈 목사와 제휴하여 총회까지 열고 사무총장에 이 파의 차유능, 부회장에는 정행덕씨 (전직 목원대교수)가 맡는 등 반공활동에 뛰어 들었고, 한강 호랑이 유람선으로 말썽을 빚은 주식회사‘세모’도 권씨의 사위 유병언이 사장으로 있는 회사다. 권씨와 유씨의 사업 확장에 불만을 품고 이탈한 이복칠(일명 이요한)은‘대한예수교 침례회 ’란 단체를 만들어 호남지역을 비롯하여 각지에 교회를 세우고 삼각지 파와 대결하고 있다. 기독교복음침례회와 대조적으로 예수교 복음침례교를 이끌고 있는 박옥수는 권신찬의 구원파와 동일한 교리와 주장을 가지고 전국적인 기반을 구축하고 있어 세칭 구원파는 3파전을 하고 있으며 이들이 경쟁적으로 교세를 확장하는 바람에 피해는 기성교회들이 입고 있다. 구원파의 피해는 미국 독일 카나다 등 우리 교포들이 살고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파고들고 있으며 미국 LA에서는 권신찬 교주의 TV설교가 매주 한번씩 나오고 있으며, 기성교회에 불만과 염증을 느낀 사람들이 미혹되고 있어 교포 사회의 새로운 문제 거리로 등장하고있다. 서독에는 간호원들 사이에 이 파가 퍼져 있다. 이 집단은 기업에 손을 대는가 싶더니 이제는 반공활동까지 하고있어 통일교의 승공, 새일 파의 멸공에 이어 3번 타자가 된 셈이다.
7) 기타 이단들
한때 부흥사로 이름을 떨치던 양도천은 계룡산에 들어가 세계일가공회를 하다가 계룡산의 신도안에서 철거당한 후 충남 논산군 두마면 속칭 양정 고개에 세계 일주 평화국을 건설하여 교주의 자리롤 지키고 있다.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다윗왕’이라고 자신을 신도들에게 내세워 뭇 여성들을 농락하고 교도소 신세까지 진 바 있는 팔영산 기도원의 전병도 교주도 최근 서울 개포동과 강원도 삼척군 태백산 깊은 산 속에서 신도들을 데리고 농장을 하고 있다.
에덴동산이 일월산이요 자신은 재림주 사명을 갖고 한국에 왔다고 주장하면서 여신도 간음 등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켰던 일월산기도원의 교주 김성복은 그 자취를 감추고 나타나지 않고 있다.
하나님의 교회 안상홍 증인회 교주 안상홍은 안식교 출신으로서 자신을 보혜사 성령이라고 주장하다가 1985년 2월25일 사망했으나 다시 공중재림 한다고 추종신도들은 믿고 있다.
천국 직통파라고 하여 1970년대 이단시비로 말썽 많던 전북 김제에 자리 잡고 있는 대한예수교복음교회는 전국의 신도들이 김제 본부까지 매주일 찾아가서 예배 드리는 열심을 보여 지나치다는 지탄을 받기도 하였다.
한때 남한산성 중턱에 자리 잡고 부부교환 등 해괴한 의식으로 교주의 구속 사태까지 몰고 온 중앙예루살램 심정교회는 신도들이 흩어졌지만 교주는 아직도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산상곡에 살고 있으며 신도들의 내왕이 잦다.
에덴문화원으로 경북 성주에서 출발하여 만교통화교(萬敎統和敎)교주로 군림한 김민석은 자신이 심판주 하나님 민석 대왕’이라고 하며 신도들로부터 금품을 사취하다가 구속당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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