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사
과연 사제들은 미사 의식을 집행하면서 빵과 포도주를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바꿀 권능을 가지고 있는가? 과연 이런 믿음이 성경에 나타나고 있는가? 로마가톨릭 교회의 입장은 다음과 같은 말로 요약될 수 있다.
거룩한 미사 의식에서 빵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바뀌며 우리는 이것을 가리켜 화체설(Transubstantiation)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성체 성사에서 빵과 포도주의 실체는 그대로 남아 있지 않고 빵의 전 실체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포도주의 전 실체는 그리스도의 피로 바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단지 빵과 포도주의 외형만 남게 된다.
로마가톨릭 교회는 이러한 믿음을 주장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빵을 축복하신 말씀을 들고 있다.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님께서 빵을 집으사 그것을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집으사 감사를 드리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그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들의 사면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린 나의 피 곧 새 상속 언약의 피니라(마26:26‐28).
그러나 이 성경 말씀을 문자적으로 취하게 됨으로써 수많은 해석상의 문제가 발생했으며 성경이 종종 상징적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구약 시대에 다윗의 신하들 가운데 몇 사람이 자기 생명을 내걸고 베들레헴에 가서 그에게 물을 길어 가져왔을 때 그는 “이것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갔던 사람들의 피가 아니니이까?”라고 말하며 그 물 마시기를 거절하였다(삼하23:17). 성경은 예수임을 가리켜 말하기를 ‘문’, ‘포도나무’, ‘반석’ 등으로 묘사하고 있다(요10:9; 15:5; 고전10:4). 모든 사람이 이 말씀들을 상징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이것은 내 몸이니라… 이것은 내 피니라.”고 말씀하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의 빵과 포도즙은 그분의 몸과 피를 상징하는 단어들이다. 이것을 상징적으로 취한다고 해서 신자들의 모임 안에 계시는 그분의 실재가 약화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함께 모인 곳에 나도 그들 한가운데 있기 때문이니라.”(마18:20)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그분께서 문자 그대로 빵 조각이나 포도주 잔 안에 임재하신다는 사상을 거절한다고 해서 그분께서 신자들 가운데 영적으로 임재하신다는 것을 거절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예수님께서 빵과 포도즙을 축복하신 뒤에 그것들이 문자적인 살과 피로 변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분께서 문자 그대로 거기 계셨기 때문이다. 그분께서는 빵과 포도즙의 형태로 나타나기 위해 사라지지도 않으셨다. 그분께서는 잔을 축복하신 후에도 여전히 그것을 ‘포도나무의 열매’라고 불렀으며 문자적인 의미의 피라고 부르지 않으셨다(마 26:29). 만일 예수님께서 그 잔을 마셨다면 자신의 피를 마셨단 말인가? 만일 포도즙이 실제적인 피가 되었다면 피 마시는 행위를 금하는 성경에 위배되는 것이다(신12:16; 행15:20).
로마가톨릭 교회의 미사 의식을 통해 빵과 포도주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 그것들은 동일한 맛과 색과 냄새와 무게와 부피를 가지고 있다. 빵은 여전히 빵처럼 보이며 빵 같은 맛을 가지고 있고 빵 같은 촉감도 그대로 가지고 있다. 그러나 로마가톨릭 교회는 그것이 하나님의 살이라고 생각한다. 포도주 역시 포도주처럼 보이며 포도주 같은 맛을 내고 포도주처럼 냄새가 나며 만일 누가 그것을 많이 마시면 포도주를 마신 것처럼 취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로마가톨릭 교회는 이것이 하나님의 피라고 생각한다.
사제는 빵과 포도주를 축복하면서 다음과 같이 라틴어로 말한다. “이것이 내 몸이니라”(Hoc est corpus meus). 이때에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음을 고려할 때 이 말에서 파생된 ‘hocus‐pocus’(속임수, 요술)란 표현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이해할 수 있다. 다음에 나오는 이야기는 많은 신실한 가톨릭 교도들이 매우 거룩한 의식으로 여기는 미사를 조롱하거나 불쾌한 것으로 만들려는 의도로 적은 것이 아니다. 그 내용이 좀 세련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는 요점을 잘 말해 주고 있다.
아름다운 프로테스탄트 자매가 가톨릭 교인과 결혼을 했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성경의 진리들과 이야기들을 믿는 가정에서 양육을 받았다. 그런데 그녀의 남편은 자기 아내가 교회에 가입하지도 않고 교회의 요구에 순응하지 않음으로 인해 불쾌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날마다 감언이설로 그녀를 달래 보았지만 그녀는 전혀 변하지 않았다. 그녀는 나무로 만든 우상에게 절하는 것, 미사, 성병, 기적, 화체설 등이 다 거짓임을 알았고 그런 것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남편은 어느 날 성당의 사제에게 찾아가서 자기의 사정을 다 말했다. “사제님, 제 아내는 불신자입니다. 아마도 사제께서 오셔야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사제께서 행하시는 모든 기적들에 대해 제 아내는 부정적입니다. 그러므로 사제께서 직접 오셔서 기적을 보여주셔야 믿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제는 그 사람과 함께 그의 집에 갔고 그 사람은 이제 모든 문제가 풀릴 것으로 기대했다. 사제는 말했다. “제가 그녀를 개종시키겠습니다. 그녀의 두 눈을 열어 놓겠습니다.” 집에 도착하자 남편은 아내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사제께서 저녁 식사를 하러 오셨소.” “어서 들어오시라고 하세요.”
마침내 식사가 끝난 두에 사제는 사람이 죄악 중에 거한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구원자의 크신 사랑을 말하면서 그분께서 친히 죄들로 인하여 자기 자신을 내어 주신 것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내일 다시 오겠습니다. 빵과 포도주를 준비해 주시기 바랍니다. 미사의 기적을 보면 마음이 달라질 것입니다.” 그러자 아내가 말했다. “빵을 굽겠습니다.” 이에 남편이 말했다. “아마 당신도 이 기적을 보면 확신을 갖게 될 것이오.”
그 다음 날 사제는 약속한 대로 와서 빵과 포도주를 축복했다. 부인이 물었다. “사제님, 이제 이것들이 변화되었습니까?” 그러자 사제가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이제 빵과 포도주는 살과 피가 되었습니다. 저의 능력으로 인해 이 빵은 하나님이 되었습니다.”
이제 이렇게 축복한 빵을 먹을 때가 되자 여인이 말했다. “사제님,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반죽할 때에 독약 반 스푼을 밀가루에다 넣었습니다. 그래도 이 빵을 살로 바꾸셨으니 상관은 없겠지요.”
사제는 할 말을 잃었다. 그는 마치 죽은 사람처럼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빵과 포도주가 그의 손에서 떨어지면서 그는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빨리 말을 대령하시오. 이 집은 저주받은 집이오.” 그러자 부인이 대답했다. “잘 가세요. 우리는 로마의 저주를 받고 싶지 않습니다.” 남편도 놀랐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보, 사제는 도망가 버렸소. 나도 이제부터 당신처럼 로마가톨릭 신화를 저주할 것이오.”
트렌트 공회는 화체설을 믿는 것이 구원에 필수불가결하다고 선언했고 이 같은 믿음을 거부한 자들에게 저주를 선언했다. 이 공회는 목사들에게 미사에 쓰이는 요소들 즉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한 부분으로서 살과 뼈 그리고 신경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동시에 그리스도 전체를 포함하고 있음을 설명하라고 명령했다.「가톨릭 백과사전」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최근에는 프로테스탄트 교회에서도 빵 조각을 입에 넣어주는 가증한 일을 행하고 있음).
예수 그리스도의 실제적 임재의 전체성 교리는 각각의 빵 조각 속에 그리스도 전체가 즉 살과 피와 육과 영과 신성과 인성이 실제로 임재한다는 것을 말한다.
가톨릭 신자들은 빵 조각이 그리스도가 되었으므로 그것을 바치는 것이 사제가 그리스도를 희생시키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트렌트 공회는 로마가톨릭 교회의 이 같은 가르침을 달리 믿는 자에게 다음과 같은 저주를 선포했다. “만일 누구든지 미사에서 참되고 적절한 희생물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그런데 로마가톨릭주의는 이 ‘희생’이 십자가의 희생을 다시 새롭게 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흘린 피의 희생이 미사에서 빵과 포도주를 통해 피를 흘리지 않고 자신의 살과 피를 드림으로써 매일매일 새롭게 되어야 한다고 명령했다.
이런 요소들이 그리스도로 변했기 때문에 그분은 우리 교회 안에 영적으로 임재하실 뿐만 아니라 실제적으로 참되게 실체 그대로 희생 재물로서 임재하신다.
이러한 의식이 수백 만 번 이상 행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매번 미사를 드릴 때의 희생 제물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므로 매번 미사 때마다 자기들이 갈보리에서의 희생과 동일한 희생을 드린다고 설명한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 자체 ‐ 즉 “그분의 살과 피, 몸과 혼, 인성과 신성” ‐ 를 십자가의 희생으로 매번 ‘다시 새롭게 하여 바치는 것’은 그분께서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요19:30)고 말씀하신 것과 완전히 상치된다. 구약시대에는 사람들이 희생물을 반복해서 드렸는데 그 이유는 그 중 어떤 것도 완전한 희생물이 못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약시대에는 그렇지 않으며 히브리서 기자는 이를 잘 말해 주고 있다.
바로 이 뜻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단 한 번 영원히 드려짐을 통해 우리가 거룩히 구별되었노라. 제사장마다 날마다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희생물들을 드리되 그것들은 결코 죄들을 제거하지 못하거니와 오직 이 사람은 죄들로 인해 한 희생물을 영원히 드리신 뒤에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으사 그 이후부터 자기 원수들이 자기 발받침이 될 때까지 기다리시느니라. 그분께서는 거룩히 구별된 자들을 단 한 번의 헌물로 영원토록 완전하게 하셨느니라(히10:10‐14).
로마가톨릭주의의 교리는 십자가에서의 그리스도의 희생을 매일매일 새롭게 반복해서 드려야 한다고 말하지만 신약성경은 이와 같은 가톨릭주의의 교리 즉 매일 같이 반복해서 희생물을 드려야 한다는 교리와 크게 대조를 이루고 있다. 신약성경은 그리스도께서 단 한 번에 영원한 희생을 드렸음을 말한다.
또 그분께서는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들의 피를 가지고 거룩한 곳에 들어가는 것같이 자주 자신을 드려야 할 필요가 없으시니 그랬더라면 그분께서 반드시 창세 이래로 자주 고난을 당하셨어야 할 것이라. 그러나 이제 세상 끝에 그분께서 단 한 번 나타나사 자신을 희생물로 드려 죄를 제거하셨느니라. 한 번 죽는 것은 사람들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뒤에는 심판이 있나니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도 많은 사람의 죄들을 담당하시려고 단 한 번 드려지셨으며 또 자신을 기다리는 자들에게 죄와 상관없이 두 번째 나타나사 구원에 이르게 하시리라(히9:25‐28).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미사를 통해 십자가의 희생을 계속해서 반복해야 한다고 믿는 자들은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을 새로이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그분을 모욕하는 것이다(히6:6).
미사에서 사제는 빵을 그리스도로 변화시킨 뒤 햇살 모양과 같은 ‘성체 현시대’의 중앙에 그것을 놓는다. 성체 현시대 앞에서 가톨릭 교도들은 절을 하고 조그마한 빵 조각을 하나님으로 여기며 경배한다. 우리는 이러한 행습이 고대 이교도들이 물건 신을 숭배했던 것과 유사하다고 말할 수 있다.
과연 이런 것이 성경적인가? 우리는 「가톨릭 백과사전」이 전하는 말에 유의해야 한다.
성경적인 증거가 없으므로 교회는 이같이 빵 조각을 신으로 여기고 경배하는 복된 성사 행위의 근거와 타당성을 가장 오래되고 늘 지속되어 온 전통 속에서 찾는다.
이러한 추론은 예수님의 말씀 즉 “(너희가) 너희의 전해 내려온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무효가 되게 하며 또 이 같은 일을 많이 행하기 때문이니라.”(막7:13)고 하신 말씀을 생각나게 한다.
화체설 사상은 많은 문제를 일으킨다. 터툴리안은 우리에게 사제들이 빵 부스러기가 떨어지지 않도록 매우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고 말하는데 그 이유는 예수님의 몸이 상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심지어 빵 부스러기에도 그리스도 전체가 포함되어 있다고 믿고 있다. 중세암흑시대에는 또한 어떤 사람이 빵을 받은 후에 토하거나 또는 이 빵을 우연히 개나 쥐가 먹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큰 논쟁이 있었다. 콘스탄스 공회에서는 그리스도의 피를 자기 수염에 흘린 경우 이 사람의 수염을 태워야 할 것인가, 아니면 수염과 그 사람을 함께 화형시킬 것인가에 대해 논쟁이 있었다. 화체설로 인해 여러 가지 이상한 교리들이 야기되었음은 모두가 다 인정하는 사실이다.
신약성경의 교회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상징하는 빵과 포도나무의 열매 두 가지에 다 참여했음은 명백한 사실이다(고전11:28). 「가톨릭 백과사전」도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시인하고 있다.
12세기까지는 서방과 동방 모두에서 교회에서 모두에게 성만찬을 행했으며 사람들이 두 가지를 다 받았다는 것은 일반적인 사실로 인정된다. 이것은 논쟁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로부터 수세기가 지난 후 로마가톨릭 교회는 신도들에게 잔을 주는 것을 금지시키기 시작했으며 단지 빵만을 먹게 했다. 단지 사제들만 포도주를 마실 수 있게 되었다. 사람이 실수로 그리스도의 피를 엎지를 수 있기 때문에 잔을 금한다고 그들은 주장했다. 그러나 초기의 제자들도 잔을 엎지를 수 있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잔을 주는 것을 금하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제정하신 주의 만찬의 요소 중 단지 반에만 참여하게 하려면 이에 대한 설명이 마땅히 있어야 한다. 그들은 ‘둘 가운데 하나에만 참여하는 것’이 둘 다에 참여하는 것과 동일한 효과가 있다고 말한다.
반 에만 참여해도 사람들은 구원에 필요한 어떤 은혜도 박탈당하지 않으며 이 경우에도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임재하시고 그분의 몸과 피, 혼과 신성 전체를 다 받는 것이다… 거룩한 어머니인 교회는… 한 가지에만 참여하는 관습을 인정하였다… 그러므로 신실한 자들이 두 가지를 다 받는 성만찬에 꼭 참여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며 성만찬을 집행하는 사제 외에는 어느 누구도 이 잔을 들지 못하도록 교회법으로 엄격하게 정하였다!
수세기 후에 이러한 법은 완화되었으며 몇몇 가톨릭 국가에서는 신도들에게 빵과 잔에 참여하는 것을 허락하고 있고 지역에 따라 이러한 관습을 달리 시행하고 있다.
과연 화체설 사상이 그리스도와 함께 시작하였는가? 유명한 역사가 두란트는 로마가톨릭 교회에서 행해온 화체설에 대한 믿음이 원시 종교의 가장 오래된 의식들 가운데 하나라고 말한다.
학적인 권위를 갖춘 「해스팅의 종교와 윤리 백과사전」은 여러 면을 할애하여 ‘신(神)을 먹는’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이 책은 많은 국가와 종족들 그리고 종교들에서 행해졌던 화체설 의식에 대한 풍부한 증거 자료들을 제시하고 있다.
이와 같은 의식은 또한 이교도 국가 로마에도 잘 알려져 있었다. 이러한 증거들은 키케로의 수사학적 질문 즉 케레스의 옥수수와 바커스의 포도주에 대한 질문에 잘 나타나고 있다. “미트라교 역시 성만찬의 성체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거룩한 연회를 베푸는 사상은 인류의 기원만큼이나 오래된 것이며 모든 시대에 온 인류 가운데 존재해 왔다.”고 「가톨릭 백과사전」은 시인하고 있다.
이집트에서는 제사장이 납작한 빵 조각을 거룩하게 구별했으며 이것이 변하여 오시리스의 살이 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이 빵 조각을 먹었고 또 의식의 일부분으로 포도주도 마셨다. 심지어 멕시코와 중앙아메리카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전혀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이 신(神)의 살을 먹는 것이 유익하다고 믿었음이 밝혀졌다. 로마가톨릭 선교사들이 거기에 처음으로 도착했을 때 그들은 자기들의 성만찬 의식을 기억나게 하는 그들의 종교 의식을 보고 밀가루로 만든 빵 조각 형상이 제사장들에 의해 거룩하게 구별된 뒤에 그것을 먹는 사람들 사이에 분배되며 또 사람들이 그것을 신의 살이라고 선포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히슬롭은 신(神)의 살을 먹는 것이 식인 사상에서 발생하였다고 말한다. 이교도 사제들이 모든 희생 제물을 먹었으므로 경우에 따라 인신 제물을 바친 경우에는 바알의 제사장들이 사람의 살을 먹어야만 했다. 그러므로 ‘칸나‐발’(Cahna‐Bal) ‘바알의 제사장’이라는 말은 현재 우리가 ‘식인종’을 부를 때 쓰는 ‘Cannibal’이란 단어의 어근이다.
미사를 드리는 동안 교회와 좋은 관계를 갖고 있는 가톨릭 교인들은 앞으로 나아가 ‘그리스도’라 불리는 빵 조각을 자기 입에 넣어 줄 사제 앞에 무릎을 꿇는다. 이것은 보통 ‘성병’(host: 미사의 빵)이라 불리는데 이 단어는 원래 라틴어로 ‘희생물’(victim) 또는 ‘희생 제물’(Sacrifice)이란 의미를 갖는 단어에서부터 파생되었다. 가톨릭 신도들은 성병이 수많은 기적을 일으키는 대상으로 생각해 왔는데 그 이유는 이 빵이 돌로도 변하였다가 피를 흘리기도 하고 계속해서 피를 흘리는 성병으로 바뀌기도 했기 때문이다.
성병은 둥근 형태로 되어 있으며 이런 형태는 주후 4세기에 성 에피파니우스에 의해 처음으로 언급되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기념 만찬을 제정하셨을 때 단순히 빵을 취하여 그것을 나누어 주셨다. 빵은 결코 둥근 모습으로 부서지지 않는다! 빵을 부수어 나누어 주는 것은 우리를 위해 심한 채찍질로 당하여 부서진 예수님의 몸을 상징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상징과 그로 인한 의미는 접시 모양의 둥근 빵 조각을 통해서는 결코 나타나지 않는다.
만일 이처럼 둥근 빵 조각을 사용하는 것이 성경적 근거가 없다면 이것 또한 이교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지 않겠는가? 히슬롭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둥근 빵 조각에서 둥근 형태는 로마의 신비주의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였는데 이것은 바알 또 태양을 상징했다.”
우리는 고대 이집트의 신비 종교에서 이러한 둥근 형태의 납작한 빵이 사용되었음을 잘 알고 있다. “얇고 둥근 형태의 빵이 제단 위에 드려졌다.” 미트라교라는 신비 종교에서도 고급 사제들은 태양 원반을 상징하는 조그만 둥근 빵이나 누룩 없는 빵 조각을 받았는데 이것 역시 태양 원반을 상징하는 둥근 삭발과 비슷한 동기에서 나온 것이다.
1854년 이집트에서는 제단 위에 조그마한 둥근 빵 조각들을 보여주는 조각품을 담고 있는 고대 사원이 발견되었다. 그 제단 위에는 커다란 태양의 형상이 있었다. 이와 유사한 태양 상징물이 위 이집트 북부의 바바인이라는 도시 근처의 신전 제단 위에도 사용되었는데 거기에는 태양을 상징하는 것이 있고 두 사제들이 그 앞에서 경배하고 있다.
이렇게 제단 위에 태양의 형상을 사용한 것은 이집트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심지어 이집트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페루에서도 이와 동일한 태양숭배 신상이 알려졌고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만일 성체 현시대가 있는 곳에서 태양의 형상 앞에 이교도들이 무릎을 꿇고 절하고 있는 모습과 성체를 태양처럼 담아 놓은 성체 현시대 앞에서 절하는 가톨릭 교인들을 비교해 보면 누구라도 즉시 이 둘 사이에 큰 유사성이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심지어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도 바알 숭배로 인해 타락했을 때 태양의 형상들을 제단 위에 세우곤 했다! 그러나 요시야의 통치 때에 이러한 형상들은 파괴되었으며 이에 대해 구약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들이 그의 앞에서 바알들의 제단들을 헐었으며 또 그가 그 제단들 위에 높이 달린 형상들(즉 태양 형상들)을 찍어서 떨어뜨리고 또 작은 숲들과 조각한 형상들과 부어 만든 형상들을 산산조각 내며 그것들을 가루로 만들어 그것들에게 희생물을 드리던 자들의 무덤에 그것을 뿌리고 (대하34:4)
고대 목판화는 우상을 숭배하던 유대인들이 경배 대상으로 삼은 이상한 형상들을 보여주는데 여기에는 기둥 꼭대기의 태양 형상들도 포함되어 있다.
성 베드로 성당의 제단과 네 개의 기둥에 의해 지탱되고 있는 30미터 높이의 천장을 보여주는 사진에서 이 기둥들은 빙빙 꼬여 있고 가지들로 덮여 있다. 로마가톨릭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물건인 제단은 기둥들의 꼭대기에 있으며 거기에는 태양의 형상들이 장식되어 있다. 벽에는 높은 곳에 거대하고 정교한 형상 즉 작열하는 태양의 형상이 있으며 이런 형상은 또한 제단 위에도 있다. 거대한 태양 형상은 또한 로마의 게수 교회의 제단 위에도 놓여 있고 그 밖의 다른 교회 제단 위에도 놓여 있다. 그런데 매우 흥미로운 것은 바빌론에 있는 거대한 신전 역시 금으로 된 태양 형상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둥그런 태양 형상은 종종 제단 위에 있는 스테인드글라스에도 있으며 또한 일반적으로 교회의 입구 위에도 있다. 중앙에 있는 둥그런 유리창들 가운데 몇몇은 아주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으며 어떤 유리창들은 태양 광선으로 둘러싸여 있다. 바빌론에는 떠오르는 태양을 마주보는 태양 형상을 갖춘 신전들이 있는데 이런 형상들은 교회 입구 위에 놓였다. 구데아 왕이 지은 초기 바빌론 신전은 입구 위에 태양신의 상징물을 갖추고 있었다. 이집트에서는 건축가들이 자기들의 신전 위에 태양원반 ‐ 때로는 날개나 다른 상징들로 둘러싸인 ‐ 을 두는 것이 일종의 관습이었는데 이것은 태양신을 영화롭게 하고 악령들을 쫓아내기 위함이었다. 물론 우리는 오늘날 사용되는 둥근 형태들이 고대 이교도 신전에 갔던 사람들이 그런 것들을 사용하면서 전달하고자 했던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계상의 유사성은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아주 공통적으로 교회 입구 위에 사용된 둥그런 창문은 종종 ‘바퀴’ 창문이라 불렸다. 고대 사람들은 수레바퀴와 같은 바퀴 형태의 도안이 태양을 상징한다고 믿었다. 그들은 태양을 커다란 수레로 생각했으며 매일같이 낮에는 태양신이 이것을 몰고 다니며 하늘을 가로질러 여행을 하고 밤에는 지하세계를 통과한다고 생각했다. 이스라엘 백성도 자기들의 예배에 바알 종교를 혼합했을 때 ‘태양수레’ 즉 태양신에게 봉헌된 수레를 가지고 있었다(왕하23:4‐11) 수레바퀴 형태의 신상 하나가 성 베드로 성당에 있는 유명한 베드로의 동상 위에 놓여 있다. 현재 영국 박물관에 있는 한 점토판은 바빌론 왕들 가운데 하나가 벨 신전에서 태양신의 상징을 복구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상징은 여덟 개로 교차된 십자가 형태로서 마치 수레바퀴의 살과 비슷하다. 바빌론의 태양바퀴는 신비주의와 점성술 등과 관계가 있다. 이와 유사한 도안이 성 베드로 교회 앞에 있는 둥그렇게 포장된 뜰에도 표시되어 있다.
마리아와 성인들을 그린 로마의 그림들은 그들의 머리 둘레에 둥근 태양의 상징물을 가지고 있다. 로마식의 삭발도 역시 둥그렇다. 둥그런 형상들은 제단과 입구 위에도 있다. 로마가톨릭 교회의 미사에 쓰이는 둥그런 성병이 놓여 있는 성체 현시대 역시 햇살을 가지고 있다. 태양을 상징하는 이러한 모든 것을 사용하는 것이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것을 종합해 볼 때 하나 하나가 현대 바빌론 신비주의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단서가 된다.
예수님께서 기념 만찬을 제정하셨을 때는 밤이었으며 아침 시간도 아니고 저녁 시간도 아니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구약의 모형들과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밤에 주의 만찬을 행하였다. 그러나 후에 주의 만찬은 아침의 모임에서 행해지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가 미트라교에서 어느 정도 영향을 받았는지 우리는 말할 수 없다. 그렇지만 우리는 태양이 떠오르는 것과 관련하여 새벽에 미트라 의식이 행해졌음을 알고 있다. 이유야 어떻든지 지금은 가톨릭 교회나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대개 주의 만찬을 아침에 행하고 있다.
가톨릭 교회에서 아침 일찍 미사를 드릴 것을 제안하게 된 요인 중 하나는 신도가 성찬을 받기 전에 금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분명히 이른 아침에는 이러한 요구를 만족시키기가 훨씬 쉬웠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와 같이 금식을 요구하는 것은 확실히 성경적인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기념 만찬을 제정하시기 바로 전에 식사를 하셨기 때문이다.
한편 엘레우시스 신비주의에서는 입교하려는 사람들에게 첫 번째로 “당신은 금식하고 있는가?”라고 질문하였다. 만일 이러한 질문에 대해 부정적으로 답하는 경우 그는 입교할 수 없었다. 물론 금식 그 자체는 성경적이다. 그러나 참된 금식은 마음에서 우러나와야 하며 사람이 만든 규칙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는 금식은 참된 금식이 아니다. 이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고 계신다.
그들이 금식할지라도 내가 그들의 부르짖음을 듣지 아니하겠고 그들이 번제 헌물과 봉헌물을 바칠지라도 내가 그것들을 받지 아니할 뿐 아니라 오히려 칼과 기근과 역병으로 그들을 소멸시키리라, 하시니라(렘14:12).
바리새인들은 엄격하게 특정한 날에 금식을 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율법의 문제에 대해서는 무관심하였다(마6:16). 사도 바울은 “음식물을 금하라.”는 어떤 명령들을 배교의 표시라고 경고하였다(딤전4:3).
미사와 미사의 복잡한 의식에 대해 비평을 하는 「로마주의와 복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 의식은 눈부실 정도로 휘황찬란하다. 불빛, 색깔, 의복, 음악, 향, 그리고 묘하게 심리적인 효과를 불러일으키는 것, 예배드리는 사람들과는 전혀 상관없이 아주 잘 훈련받은 자들이 멋있게 의식을 수행하는 것 등은 장엄한 광경을 묘사하기에 충분하다. 예배하는 사람들은 사실 구경꾼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함께 참여하는 자들이 아니며 고대 신비종교의 의식에 참석하던 구경꾼들과 비슷한 존재들이다.
로마가톨릭주의에 대한 유명한 작품은 미사 때에 사제가 행하는 기계적인 의식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는 십자가 표시를 열여섯 번이나 하고 회중을 향해 여섯 번 돌아서고 하늘을 향해 자기 눈을 열한 번 들고 제단에 여덟 번 입을 맞추고 자기 팔을 네 번 모으고 자기 가슴을 열 번 치고 머리를 스물한 번 굽히고 무릎을 여덟 번 구부리고 어깨를 일곱 번 숙이고 십자가 표시로 제단을 서른 번 축복하고 제단에 손을 스물한 번 놓고, 열 한번 은밀하게 기도하고. 큰소리로 열세 번 기도하고 빵과 포도주를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바꾼 후 잔을 열 번 덮었다 열었다 하고 앞으로 뒤로 스무 번 왔다 갔다 한다.
이러한 복잡한 의식 외에도 찬란한 제복, 양초, 종, 향, 음악 그리고 로마가톨릭주의가 자랑하는 각종 겉치레가 있다. 이 모든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단순한 기념 만찬과 얼마나 대조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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