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발전의 법칙, 변증법
변증법은 어떤 한 명제가 있고 그 명제에 반대하는 다른 명제가 있어 서로 대립하다가 이 둘을 아우르는 제 삼의 해법을 마련해 논리가 질적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말합니다.
불교의 역사도 이와 같아 오늘의 불교는 처음 등장할 때의 모습이랑 많이 다르게 발전해왔습니다.
불교약사
불교의 창시자인 석가모니(또는 고타마 싯달타)는 인간의 생로병사에 관해 오랜 고뇌 끝에 내린 결론으로
고통은 과업에 따른 결과라는 연기의 법칙과
업의 원인이 아집이므로 집착을 버리고 마음씀씀이를 잘 다스리는 해법을 제시해
모든 고뇌로부터 해탈할 것을 가르치는 가르침인 원시불교에서부터 시작해
자기 수행을 통해 마음씀씀이를 잘 다스리는 해법을 제시하셨습니다.
즉 원시불교의 핵심은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에서 부터 출발해 문제의 원인을 밝히고 그 문제의 해법으로 제 마음을 잘 다스리는 방법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원시불교에서 대승불교로
그러나 이후
석가모니의 제자들은 스승의 가르침을 원리원칙대로 준행하되 이를 뛰어넘어,
문제의 원인과 해법을 한 개인에게만 한정시키면 한계가 있기 때문에
(사회전체로 확장시키지 않으면 진정한 해법이 될 수 없을 것이므로)
구원 개념을 한 개인에게서 사회전체로 확장해 동시 상호발전시키는 방식으로, 즉
깨달은 대로 몸소 실천하므로써 이웃을 구제하는데 까지 나아가 서로 다독거리며 용기를 북돋아주는 실천 공동체로 발전시킨 대승불교로 나아갔습니다.
대승불교 내부 논쟁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궁극적으로 구원은 개개인의 과제일 뿐만아니라
이 세상을 완전한 불국토로 만들기 까지 실천 공동체가 세속의 한 가운데서 온전히 살아남기도 쉽지않고 오히려 세속화되기도 쉽기 때문에 차라리 더 순수했던 처음으로 되돌아가려는 경향 즉 원시불교로 되돌아가자는 쇄신 운동이 내부에서 일어나 소승-대승 분리논쟁을 일으켜 서로 대립하곤 했습니다.
그 다음은
이런 단계를 거쳐
이 둘 모두를 뛰어넘기 위해 양쪽 모두를 부정하고, 아니 먼저 양쪽으로부터 자기를 분리한 후 양쪽 모두를 아우르기 위해 반드시 지켜야할 핵심교리를 바로 세우려는 제 삼의 사상인 중관사상에 바탕한 반야(지혜)불교가 등장했습니다.
중관사상, 반야불교의 등장
이때 중관이란 어느 한쪽을 편들어 집착하지 않는다는 말로 가운데 입장에 선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양쪽 생각의 바탕인 기본전제들을 부정하므로써 양쪽 모두를 부정합니다.
(그리고 반야불교는 원조인 인도 원시불교와도 매우 다르게 중국 고유의 불교로 됐습니다.)
예를 들어,
중관사상은
이전 불교에서 말한대로
‘불성무물’
즉 ‘일체(우주)의 모든 것들이 오직 성실하므로 존재할 수 있다’는 생각에 반대해
오직 연기의 법칙을 따라 일체의 모든 것들이 인과관계를 따라 생겨나 계속 변하기 때문에 고정불변한 속성 즉 내재적인 법칙(‘성실함’)조차 없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는 이른바 ‘공’ 사상입니다.
색즉시공은 혁명적 허무주의
즉 공 사상은 단지 모든 것의 실체를, 그 실체의 속성을 부정할 뿐만아니라 실체가 ‘있다’ 또는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체가 (나의) 집착에서 나온 것이므로 이를 끊고 자유롭게 생각하기 위해선 실체는 ‘없다’고 깨달아야 (모든 집착으로부터 벗어나) 생각이 자유로워질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이런 공 사상을 계속 확장하면 모든 것이 다 ‘공’ 즉 ‘없다’ 이고 원래 고정불변하는 속성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중관사상을 따르면 온 우주에 무엇의 실체라고 부를 만한 속성 또는 알맹이란 애초부터 없었으므로 알맹이의 존재 뿐만아니라 그 속성을 파악하려는 목적으로 이끄는 어떤 가르침 조차도 아무 쓸모 없게 될 것입니다.
언뜻보면
이런 중관사상은 이전 불교의 모든 가르침을 다 부정하는 매우 위험한 혁신적인 사상처럼 보입니다.
즉 중관사상은 비록 불교에서 나왔지만 지금까지 논한 교리조차도 다 부정해버려 마치 불교가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중관사상은 포스트모더니즘의 해체주의를 쏙 빼닮았습니다.)
예를 들어,
만약 누가 ''해탈’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당장 ‘누가 너를 번뇌에 묶어놓았느냐’고 되묻습니다.
(되물은 까닭은 '아무도 너를 번뇌에 사로잡히게 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즉 '너 스스로 집착에 사로잡힌 것'이란 뜻입니다.)
이때 이런 식으로 물음의 기본전제를 부정해버리니 더 이상의 논의가 진행될 수도 없겠지만
그러나 물은 사람은 ‘번뇌’도 있고 ‘해탈’도 있다고 굳게 믿었기에
한번도 제 질문의 전제조건 자체가 잘못됐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의심을 해본 적이 없었으므로 이런 되물음 때문에 곧바로 깨달음을 얻게 될 것입니다.
즉 그 깨달음이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 ‘해탈’하려고 애쓰는 것 자체가 이미 또다른 번뇌이므로 만약 내가 ‘번뇌’하지 않아 번뇌로부터 자유로우면 그것이 곧 이른바 ‘해탈’일 것이므로 해탈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더 나아가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스승)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 (극복하고 뛰어넘은 후 잊어버리라)’
고 까지 다소 ‘과격하고 거침없이’ 행동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공’(없음)을 기반으로 세운 사상?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이 반야사상은 불교의 ‘이단아’ 입니다.
(어쩌면 이 반야사상은 중국 고래의 노장사상을 불교에 접목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즉 중국화된 불교의 곁가지일 뿐입니다. 그러나 동아시아 삼국 즉 중국에 이어 우리나라와 일본 불교가 이 전통을 이어받았습니다.)
이는 비록 반야사상이 불교의 깊이를 더욱 풍부하게 만들기는 했으나 여전히 장손은 원시불교이거나 이를 계승한 대승불교이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반야사상은 구원에 이르는 소승-대승 논쟁 자체로 부터 벗어나 있기 때문에 나름대로 이른바 득도에 이르는 빠르고 훌륭한 길이 될 수는 있겠으나
자칫 이런 생각에 빠지면 지금까지 집대성한 불교의 모든 구원 교리들을 몽땅 다 쓸모없는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기 때문에
모두가 오로지 대오각성의 한 목표에 이르기 위해 지름길로 용맹정진 하다보면 대다수가 그 수련과정에 다소 지적 뿌리가 허약해지게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뿐만아니라 이런 생각에는 ‘중심’이 없습니다.
즉 모든 것은 공일뿐 다 변하기 때문에 영원불변한 중심축이란 게 없게 됩니다.
물론 이 때문에 이전 모든 생각들을 ‘통쾌하게’ 논박할 수는 있겠지만 정작 자기 고유의 논리란 단지 (원래) ‘없다’ 이 한마디 뿐입니다.
그런데 만약 어떤 사상이 기본전제조건 자체가 없다면 그 바탕위에 공고한 논리를 세워나갈 수도 없을 것입니다.
(여기서 기본전제조건이 논리의 중심축을 이룹니다.)
그러므로 변증법적 정, 반, 합에 따라 원시불교, 대승불교, 반야불교로 이어지면서 논리체계가 이미 완성된 것이 아니라 각각 계속 더 나아가 선불교와 호국불교로 까지 발전해오고 있습니다.
원시불교로부터 시작해 대승불교, 반야불교를 거쳐 선불교와 호국불교로 발전해오다
간략히 말해
선불교는 원시불교에서 부터 핵심인 반야불교를 거쳐 (방편으로 삼아) 대승불교(를 목표)로 나아가자는 것이고,
호국불교는 호국불교를 (거의) 대승불교의 완성체로 본 것입니다.
‘참선’이란 돈오점수의 수련과정을 거쳐 이른바 득도에 이르는 길을 말하며,
석가모니의 원래 가르침보다 이전부터 전해내려온 조사(스승)들이 득도에 이르른 과정의 일화나 또는 득도 후 부른 게송 등을 모아논 ‘공안’(화두)을 붙잡고 명상에 잠기거나 깨닫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좌선’을 ‘참선’과 같은 것으로 생각해선 안될 것입니다.
머리만 깎는다고 다 중이 아니듯 호젓한 암자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좌선한다고 해서 다 득도하는 것도 아닙니다.
한편
득도한 척 거들먹거린다고 해서 남들이 알아주는 것도 아니며 오직 득도한대로 저자거리로 내려가 몸소 실천해 밭가는 소가 돼야 이제 막 불붙기 시작한 불씨가 생명의 씨앗이 돼 활활 잘 타오르게 될 것입니다.)
한국 불교는 호국불교
호국불교는 국가라는 크고 튼튼한 수레를 만들어 모두 다 타고 능히 천하를 횡단하고 고해같은 대양도 단숨에 건너자는 것입니다.
물론 이를 위해 먼저 온 나라를 불은에 귀의토록 포교해 불국토로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한국 불교의 독특성은 선불교 전통과 특히, 바로 이 (자랑스런) 호국불교 입니다.
(한국 불자들의 생각의 규모가 이 정도로 거대하고 건강합니다.)
간추리면
불교의 발전사는
원시불교로부터 시작해 대승불교, 반야불교를 거쳐 선불교와 호국불교로 변증법적 역사발전의 경로를 따라 발전해오고 있습니다.
덧붙여
불교사가 원시불교로 부터 시작해 대승불교, 반야불교로 변증법적 경로로 발전해오고 있는 것처럼
'사회전체를 통제하고 규정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논쟁도 상부구조냐 하부구조냐는 논쟁으로 시작해 발전해오고 있습니다.
즉 사회주의 이론의 창시자인 카를 마르크스 이전 시대에는 중세유럽 교회사에서 보듯 눈에 보이는 권력들인 정치, 종교 등으로 이룬 상부구조가 사회전체를 통제 및 규정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마르크스의 눈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부구조인 경제권력의 토대 위에 사회전체가 통제 및 규정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이때 하부구조인 생산력과 생산관계 사이에서 그 시대의 경제권력이 나옵니다.)
마르크스 이후 시대에는 비교적 최근까지도 한동안 주요요인이 바로 이 상부구조냐 하부구조냐는 논쟁으로 발전해왔지만
오늘 사회전체를 통제 및 규정하는 것은 상부구조도 하부구조도 아닌 바로 인간이 그 주체임을 선언한 사상으로 발전해오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오직 인간만이 '자주적이고 창조적이며 의식적인' 사회적 주체임이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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